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살면서 겪는 분란과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불교 이론에서도 ‘보고 싶은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하거나 만날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그리움을 뜻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와 ‘보고 싶지 않거나 미워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을 뜻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를 팔고(八苦)로 꼽는 것을 보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고 끊는가가 나의 행복과 고통을 좌우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럼 어떻게 하면 나한테 맞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 우월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맞닿아있는 질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인간의 우월의식에 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우월론자들이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해 낸 근거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이성적 능력’이다. 이는 논리적 사고를 통해 보편원리를 탐구하는 특유의 능력이니 인간을 고유한 존재로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를 방법론으로 삼는 과학기술연구가 놀라운 성과를 내며 인간우월주의에 대한 지지는 더욱 강화됐다. 16세기 과학혁명을 시작으로
“페미니즘은 내게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 입니다.” 몇 해 전에 수업을 들었던 한 남학생의 말이다. 는 2019년도에 개설된 강좌이다. 젠더갈등과 반 페미니즘 정서가 심화하던 시점이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즘을 “여성특권”, “구시대적 사상”, “여성우월주의”로 호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총여학생회 해체가 한 해전인 2018년도에 동국대에서 결정되기도 했다. 강좌 개설 취지는 그렇지만 뜨겁던 논쟁 한 복판에 뛰어들어 열띤 토론을 벌이자는 데 있지 않았다. 물론
작년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수상과는 별개로, 뜬금없이 좋은 글이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지에 대한 논쟁 아닌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다. 아마 한강 작가 특유의 심리를 파고드는 문장과 서술 방식에 크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 독자들이 저런 문제를 제기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장르에 따라 좋은 글을 판단하는 기준이 완전히 다를 수 있겠지만, 텍스트 언어학을 전제로 그 기준을 말해야 한다면, 결속성(Cohesion)과 응집성(Coherence)을 제시할 수 있다. ‘결속성’부터 설명해 보자면, 글에서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 한 가족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 매회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주·조연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관련 내용이 연이어 보도되기도 했다. 만나는 지인들도 드라마 이야기를 하고 SNS에서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연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국민적 인기를 얻은 드라마의 탄생이었다. 이 드라마가 정말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드라마를 알고 있는지 본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정반대
2016년 알파고에 충격을 받고, 2022년 ChatGPT에 놀란 후, 이제는 AI의 발전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새로운 지능의 출현에 혹자는 열광하고 혹자는 두려움을 느낀다. AI의 신화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신화는 완성과 동시에 종말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미지의 존재가 지니는 월등한 능력은 자극적이다. 수백 페이지의 텍스트를 몇 초 만에 요약하고, 단숨에 외국어 능력자로 만들어 주며, 소설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그림과 그리는 모습은, 가히 경이적이다. 개인의 능력 밖 세상에서도 AI를 입고 활보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나
치열하고 한편으로는 엄혹한, 불안과 알 수 없는 분노가 팽배했던 시간 동안에도 우리의 강의실에서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의실 밖에는 초조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날카로운 말들이 횡행해서 그 언어가 내 언어가 되지 않도록 한껏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했던 문학가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문학은 인간의 손에 인간의 문제를 돌려주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지극히 개인적 속성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동안에도 사람들의 말은 더욱 위협적으로
요즘 융합 교육에 관한 시도가 많이 보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인류의 교육이 융합 아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특히 기술이라는 행위가 모든 이의 삶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에는 모든 게 융합으로 이뤄졌었습니다. 선사 시대 호모사피엔스에서 고대, 중세까지의 인류는 모두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 점점 고도화된 기계 조작이 기술의 복잡함과 정교함으로 이어졌고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기술의 의미가 제조업에 쓰이는 재주로 의미가 축소되어 모든 이의 생활에서 괴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조 산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인류의 교육과정이 비(非) 융합되었습니
인공신경망과 딥러닝 이론을 선도적으로 연구한 공로로 202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최근 BBC 라디오에 출연해 향후 30년 이내에 AI 때문에 인류가 멸종할 확률이 10~20%에 이른다고 말했다. 힌턴이 AI의 위험성에 대해 이처럼 심각한 경고를 한 이유는 조만간 인간을 뛰어넘는 ‘강력한’ AI가 등장해 인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력한’ AI는 챗GPT처럼 인간 수준에 도달한 인공일반지능(AGI)이나 인간 수준을 넘어서는 인공초지능(ASI)을 말한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깊은 좌절과 슬픔에 직면하는 상황이 관계적 상실이다. 잠시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타자와의 돈독한 관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타자와 이별이다.일시적인 이별로부터 영원한 이별에 이르기까지 그 상심의 깊이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럼에도 일시적인 이별이 긍정적 사실로 전환될 수 있다는 만남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 고문은 고통과 아픔의 새로운 시작이다.오래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서 이름만 남아있던 가수를 AI 기술로 이 세상에 부활시켰다. 무대의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대응해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법원도 예외가 아니다. 대법원은 오는 2025년부터 차세대 전자소송 시스템에 자동으로 판결문을 추천하는 생성형 AI를 도입할 예정이다. 이 기술은 법원이 사건을 접수하면 이 기술은 해당 사안과 유사한 하급심 판결 10건을 자동으로 추천해 주며, 기존의 법고을LX(국내 최대의 법률정보 데이터베이스)에서처럼 키워드로 판례를 검색하는 것을 지양한다고 한다. 생성형 AI는 새로운 사건 서류의 텍스트를 분석한 후, 가장 유사한 판결문을 추천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이야기 좋아하세요? 대부분 이야기는 한 사람이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아가 해피 엔딩 혹은 배드엔딩으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겪는 사연을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끼는 이유는 주인공의 특출난 외모나 특별한 능력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나 공감되는 처지나 혹은 기가 막히는 주변 인물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성공 여부는 주인공, 사건 그 자체, 주변 인물들보다 그 모든 것을 품는 이야기의 배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어떤 이야기든 나름의 각기 다른 뒷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세계관
‘판단중지(判斷中止/에포케)’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기본 의미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든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든, 그것의 참이나 거짓을 옳음이나 그름을 또는 좋음이나 나쁨을 성마르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유보하라’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처세훈이자 철학적 지침이다. 하지만 어쩐지 진부하게 들리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판단중지의 이념은 21세기 우리 삶에서 너무 낡은 것이어서 그 이론적·실천적 유효성이 별로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나는, 판단중지가 일상적 차원에서든 학문적 차원에서든, 비록 그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그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본능적으로 타인과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는 말을 한 것인데, 이렇게 맺어야 하는 인간관계는 본능으로만 정의하기에는 매우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과업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으며,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 중에 ‘대인관계 유능성’이란 것이 있다. 대인관계 유능성은 사람과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비대면 상황에서 학습 가능한 방법 중 하나로 메타버스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 차원에서 입학식이나 졸업식과 같은 공식행사를 메타버스로 진행하기도 하였고 교과목 수업을 메타버스로 개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언어 수업을 웹엑스나 줌과 같은 회의용 플랫폼으로 진행할 때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수업의 일부를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시도도 많았다. 메타버스 중 한국어교육에 활용된 플랫폼은 게더타운(Gathertown), 이프랜드(ifland),
4월의 교정에 날리는 꽃잎들은 한낮에 더 빛이 나고, 봄밤의 나뭇가지와 꽃망울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풍경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웃고 있는 우리 대학생들의 웃음은 이유가 없어서 더 사랑스럽다. 이즈음의 학생들에게 나는 가끔 예방주사라도 한 방 놓아주겠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장난삼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 학생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고 한 녀석 두 녀석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작가 F.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심히 쓴 것처럼 보이는, “노력해서 겨우 적응한 것들을
3월이다. 3월의 캠퍼스는 신입생의 생기발랄함으로 채워진다. 이 무렵 만나는 신입생에게 어떤 대학생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신입생들이 기대하는 대학생의 모습인 듯하다. 자기 관점과 주관을 정교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자기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학생에게 자신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개 MBTI를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성향을 나타내는 네 개의
최근 전 세계적으로 소위 가짜뉴스(Fake News)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사회 문제들이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각국, 그리고 국제기구에서 주요 의제로 다뤄지고 있다. 최근 독일 뮌헨에서 끝난 뮌헨안보회의(MSC)에서 20여 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가짜뉴스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하였다. 올 한 해 동안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40억 명 이상의 유권자들이 크고 작은 선거에 참여하는 가운데 첨단 인공지능(AI) 기술을 악용하여 만들어진 ‘진짜 같은 가짜뉴스’가 선거판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가짜뉴스는 ‘정치·
단일민족.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삼아 한반도에서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며 문화나 풍습, 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 이 개념은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할 때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정서적 동질성 추구도 이러한 단일민족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국제사회는 이런 인식을 비판한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2007년 7월에 한국이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해당할 수 있으니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노력을 해달라고 우리 정부에 권고했
4천여년 전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들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항상 요즘 젊은이들은 문제였다. 물론 말하는 사람을 위한 건지 듣는 사람을 위한 건지, 누굴 위한 건지 알기 힘든 꼰대질을 당하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특히 코로나 시기를 거친 이후의 일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 지면을 빌어 꼰대질, 혹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 언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칼럼을 읽은 학생이 혹시 스스로 무언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면 오히려 그 학생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