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수상과는 별개로, 뜬금없이 좋은 글이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인지에 대한 논쟁 아닌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다. 아마 한강 작가 특유의 심리를 파고드는 문장과 서술 방식에 크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 독자들이 저런 문제를 제기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장르에 따라 좋은 글을 판단하는 기준이 완전히 다를 수 있겠지만, 텍스트 언어학을 전제로 그 기준을 말해야 한다면, 결속성(Cohesion)과 응집성(Coherence)을 제시할 수 있다. ‘결속성’부터 설명해 보자면, 글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문법적 연결이 자연스럽게 결속된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앞 문장에서 ‘빨간 의자’에 대해 설명했다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다시 의자를 언급해야 할 때, 지시사 ‘그’를 넣어 ‘그 빨간 의자’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적절한 지시사나 접속부사의 사용, 앞에서 사용된 어휘를 반복해서 사용하거나 유사어로 대체하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을 강화해서 글을 보다 더 결속력 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영서는 친구와 영화를 봤다. 그녀는 기뻤다.”라고 할 때, ‘독자’에 따라서 ‘영서’를 ‘그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친구를 ‘그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영서가 친구와 영화를 본 사실을 알고 기뻐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결속성만을 고려하면, 문법적 연결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더라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느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엉뚱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바로 ‘응집성’이란 개념이다. 핀란드의 유명한 텍스트 언어학 연구자인 엥크비스트(Enkvist)는 아무리 정확하게 문법과 어휘가 연결되고 각 문장들이 결속되었더라도 ‘독자’가 그 결합된 내용을 토대로 적절한 ‘배경지식’과 결합해서 자신만의 이해를 만들 수 없다면, 응집성 차원에서 좋은 글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어떤 글이 응집성을 확보하려면,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와 문법이 문장과 문장을 결속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결속된 내용이 독자의 배경지식과 결합하여 자신만의 의미를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겠다면서도,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건, 일단 출발부터 틀렸다고 봐야 한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실린 「보일러」를 보면, 느닷없이 찾아와 전평호텔을 묻는 노인이 등장한다. 혹자는 이 낯선 상황에서 그 노인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문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는 말로 노인을 문전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노인의 말에 따뜻한 화법으로 반응하고, 늦은 밤 쉴 수 있도록 거처까지 제공해 준다. 무엇이 그런 응대가 가능하도록 했을까? 짜증이 치밀어 오를 수도 있는 그 찰나였지만, 늦은 밤, 이 추운 날씨에 굳이 찾아와 ‘전평호텔’을 물어보는 노인의 사정과 상황을 어느 정도 고려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독자(청자)를 고려할 수 있다는 건, 꼭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따뜻한 화법, 자신만의 다정한 무드(mood)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과정이다. 우리도 지인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모범 답안에 기초한 결속성이 아니라, 바로 응집성을 고려한 다정한 화법으로 응대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순간순간 내가 있는 학교(직장), 집, 사교 모임 등에서 제법 ‘선한 존재’로 현현할 수 있으려면, 일단 상대방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모범 답안처럼 정확한 어휘와 문법에만 치중된 결속적 표현이 아니라, 독자(청자)를 고려해서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응대할 줄 아는 응집력 있는 사람 말이다. 대화에도 기술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게 기술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