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교정에 날리는 꽃잎들은 한낮에 더 빛이 나고, 봄밤의 나뭇가지와 꽃망울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풍경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웃고 있는 우리 대학생들의 웃음은 이유가 없어서 더 사랑스럽다. 이즈음의 학생들에게 나는 가끔 예방주사라도 한 방 놓아주겠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장난삼아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중간고사가 끝날 즈음, 학생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질 것이고 한 녀석 두 녀석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작가 F.스콧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무심히 쓴 것처럼 보이는, “노력해서 겨우 적응한 것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다”라는,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않는 멋진 문장이 있다(워낙 소문난 명문장이 많은 고전이라 더 그럴 것이다). 이번 학기 나의 한 명민한 수강생은 이 문장에서, 기꺼이 동화되고 싶어 했던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결국 그곳에서 실망한 젊은이(‘닉’)의 회의감과 실망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종종 너무 바라고 소원했던 생의 사건들과 마침내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경험한다. 스무 살, 대학 입학, 복학, 사랑, 독립, 취직 등, 뭐 그런 인생의 사건들 말이다. 그런데 그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겨우 편해진 시간들은 동시에 나에게 새로운 안목과 자각을 주기 때문에,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그 끝에는 흔히 진한 실망이 뒤따른다. 이것을 두고 누군가는 실패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생망’이라 자조하며 쓸쓸해한다. 우리가 이 세계에 안착하기에는 무능하고 부족했기에 결국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끝에 늘 따르게 마련인 불가피한 실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나의 예방주사가 효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강의하는 <문화와예술 명작세미나>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는 고전 작품들은 하나같이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엉켜 있는 인간들을 품고 있다. 학생들은 오이디푸스와 세일즈맨 윌리, 베르테르와 개츠비, 빌리(엘리어트)와 강두가 우리에게 삶의 웅숭한 진리를 알려주는 대단한 인간들이고, 결국 고전 명작은 인생의 거대한 교훈이 담겨있기에 우리가 읽어야 하는 미션같은 작품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고전 안에서 지금 우리처럼 끊임없이 ‘주저하는 인간’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읽을 맛이 난다고 말해준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어도, 더 많이 알고 있어도, 인간은 매 순간 흔들리고 선택하고 만족하다가 곧 후회한다. 부모와 친구가, 선배와 동료가 조언해 주고 도움을 주어도, 인간의 착각과 오해, 고민과 후회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는 실망없이 살려고 하기보다 “씩씩하게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삶에 대한 신뢰와 관대함을 갖게 한다고 알려준다. 간절하게 기대한 ‘나’와 내가 바라고 희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실망에 포박당한다. 실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힘든 순간이다. 실망하는 나를 잘 들여다보면 정작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워서 생긴, 나에 대한 실망일 때도 많다. 누군가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래서 실망할 수 있음에 늘 대비한다면, 실망과의 화해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것 같다. 비슷한 의미의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똑부러진 이 말보다 “씩씩하게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표현이 더 선명해서 좋은 것 같다. 탐나는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아무 일도 없지만 그저 봄이라는 이유로 축복받은 느낌이 드는 것은, 딱 이 계절의 며칠에 허용되는 속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소중하다. 이 봄에 당신에게 탐나는 것이 또 있는지 묻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