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융합 교육에 관한 시도가 많이 보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인류의 교육이 융합 아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특히 기술이라는 행위가 모든 이의 삶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에는 모든 게 융합으로 이뤄졌었습니다. 선사 시대 호모사피엔스에서 고대, 중세까지의 인류는 모두 기술이 발전하면서부터 점점 고도화된 기계 조작이 기술의 복잡함과 정교함으로 이어졌고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기술의 의미가 제조업에 쓰이는 재주로 의미가 축소되어 모든 이의 생활에서 괴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조 산업이 발전하면서부터 인류의 교육과정이 비(非) 융합되었습니다. 학교도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대학은 산업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효율성을 따지고 빠른 연산을 위해 컴퓨터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대학의 기능이 지금의 인공지능이 하는 일을 맡아 하는 손 빠른 인력을 배출하는 곳으로 둔갑했습니다. 무엇이든 빠르고 많이 생산하는 시대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런 기술의 시대가 새로운 산업군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인류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기술의 영역을 만든다.’라는 명제가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정한다.’라는 생각은 해볼 새도 없이 계속 기술을 이용하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의 교육계입니다. 이제야 기술이 만들어낸 인간의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기술은 보다 정교해지고 있는데 교육과정의 틀은 몇백 년 전의 방식을 그대로 답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괴리가 없기 위해서는 기술이 첨단으로 가고 모두가 기술의 안락함을 맛볼 때 모든 교사와 교수들도 기술자였어야 했습니다. 혹은 기술 철학자였어야 했습니다.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테크놀로지의 사용입니다. 단, 아날로그 테크놀로지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함께 가르치는 화학적 방법이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술은 아날로그에서 시작했습니다. 연필로 글쓰기도 붓으로 글쓰기 시대에서는 미래의 테크놀로지였습니다. 해당 기술이 어떤 영감에서 나타났는지를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테크놀로지의 정서를 가르치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 단순히 교수자의 연구 방법을 학습자에게 소개하고 이식하는 과정이 수업이 되어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아 학습자가 혼란해합니다.
제가 맡고 있는 ‘빅데이터와 역사학’에서는 과거 합격자를 둘러싼 빅데이터를 디지털로 전환해서 시각화하기도 하고 한류의 역사에 관한 빅데이터를 시각화합니다. 역사에 혼재한 데이터의 아날로그를 시각화 소프트웨어로 디지털리제이션(digitalisation)하는 수업입니다. ‘3D 타임머신’과 ‘3D 역사 파노라마’에서는 조선시대 호모사피엔스의 아날로그 정서를 2025년 호모사피엔스가 디지털로 전환합니다. 조선의 산수화를 디지털라이즈하는 ‘몽유도원도 프로젝트’에서는 시각화, 모델링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손재주도 익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전환에서 나오는 융합적 내러티브 즉, 입체적 인지력입니다. 조선의 화가 표암 강세황이 어떻게 당대 정서를 표현했는지 알아가면서 제2의 강세황이 되어보는 가상적 경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의 결과를 증강 현실로 구현하는 ‘디지털 큐레이션’ 수업의 결과는 이력서의 한 줄이 되어 학습자의 진로를 송두리째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업의 결과는 눈에 보이는 객체를 만들어낸다는 것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정서와 이치를 깨우친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결국 데이터와 3D의 가상세계성 내러티브가 우리 뇌의 한 층위에 존재함을 기술을 통해 배우게 되면 융합 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