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정 다르마칼리지 초빙교수
▲이은정 다르마칼리지 초빙교수

“페미니즘은 내게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 입니다.” 몇 해 전에 수업을 들었던 한 남학생의 말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이해>는 2019년도에 개설된 강좌이다. 젠더갈등과 반 페미니즘 정서가 심화하던 시점이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즘을 “여성특권”, “구시대적 사상”, “여성우월주의”로 호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총여학생회 해체가 한 해전인 2018년도에 동국대에서 결정되기도 했다. 강좌 개설 취지는 그렇지만 뜨겁던 논쟁 한 복판에 뛰어들어 열띤 토론을 벌이자는 데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니 그에 앞서 먼저, 한국사회를 달군 여러 논쟁이나 쟁점에서 한 발 떨어져 현대 페미니즘의 역사를 수놓은 주요 사상가의 주장을 좀 더 차분하고 냉철하게 들여다보자는 데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하며 사유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남아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새로 떠오른 문제는 무엇일까? 보부아르는 무슨 말을 했지? 버틀러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이들 사상가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시작한 첫해 학생들의 눈은 반짝였고 태도는 당당했다. 바로 전해까지 있었던 총여학생회의 수혈을 받은 덕일까. 학생들은 단단했다. 페미니즘 공부가 비교적 두터웠고 문제의식 또한 날카로웠다. 학생들은 뭔가 신이 난 듯했고 활기찼다. 몇 해가 지나고 나는 불편한 상황에 직면했다. “시간표 공유가 껄끄럽다.” 한 여학생은 말한다. “메갈”, “꼴페미”라는 낙인과 혐오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볼드모트(해리포터에 나오는 악당)처럼 금기어가 되었다.” 또 다른 여학생은 말한다. 이 여학생은 중학교 때만 해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당차게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혐오와 낙인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많은 학생이 자신을 끝없이 검열하고 조심하고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고 토로한다. 필요하다면 자신을 감추거나 부인해야 한다고. 명백한 성차별에 대한 항변은 싸움이 되고 조롱이 된다. 그런 사이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그 사실만으로 주눅 들고 혹이라도 들킬까 두려워하고 숨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 수치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적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그런데도 여성의 문제는 이제 없다고, 페미니즘은 불필요하다고 혐오와 낙인에 떠밀려 모른 척, 무관심한 척 그리 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라고 말하는 누구든 그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여성의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를 바로잡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모두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더 행복해지려면 필요한 사유의 전환, 관점의 새로움, 페미니즘은 그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보부아르, 성차의 망각을 문제 삼고 그 회복을 주장한 이리가레, 젠더 수행성 개념을 통해 젠더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밝히고자 한 버틀러, 보살핌윤리를 내세우며 도덕심리학의 영역에 새 바람을 일으킨 길리건,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반기를 든 하딩… 페미니즘은 이제껏 사유한 적 없는 지점을 사유하게 하고 이제껏 질문한 적 없는 지점을 질문하게 한다. 배움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적어도 배움의 순수성이 의심받지 말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은 내게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한 상상력’ 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편견과 억측과 고정관념을 깨는 망치다. 배움의 자유와 즐거움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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