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중지(判斷中止/에포케)’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기본 의미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든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든, 그것의 참이나 거짓을 옳음이나 그름을 또는 좋음이나 나쁨을 성마르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유보하라’는 것이다. 이는 중요한 처세훈이자 철학적 지침이다. 하지만 어쩐지 진부하게 들리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판단중지의 이념은 21세기 우리 삶에서 너무 낡은 것이어서 그 이론적·실천적 유효성이 별로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나는, 판단중지가 일상적 차원에서든 학문적 차원에서든, 비록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닐지라도 또한 그 나름의 난점과 한계를 갖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매우 의미심장하고 효력 있는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철학 사조를 창시하면서, ‘판단중지’를 또 다른 철학 이념인 ‘환원(還元/되돌림)’과 더불어 일반적인 철학적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그 요점은 ‘우리 마음에 있는 기존 믿음들의 작동과 효력을 정지시켜 그들로부터 영향받지 말고(판단중지),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근원적 차원으로 바꾸고 되돌려(환원), 그 되돌아간 입각지에서 사물과 사태를 새롭게 보면서 그 본질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중지와 환원은 서로 짝을 이루며 함께 나아간다.
놀랍게도 후설은 자연 세계-물리적 우주-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믿음조차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상식적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철학이나 종교의 관점에서 이해 불가능한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갖는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 모두가 단번에 전부 판단중지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후설이 이미 암시하기는 했지만, ‘전면적·보편적 판단중지’와 ‘일시적·부분적 판단중지’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 구분을 바탕으로 판단중지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일시적이고 국소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위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는 무수하다. 몇몇 예를 살펴보자. (1) 인공지능 기술의 총아인 챗GPT는 감탄할 만한 정보 탐색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종종 잘못된 정보 심지어 가짜 정보를 만들어 낸다. ‘세종대왕 맥북프로 던짐 사건’이라는 인터넷 밈은 한 극단적 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학습 가능한 인공지능은 늘 신뢰할 만하고 적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제를 판단중지해야 할 것이다. (2) 여러분이 지금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연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연구가 종교변호론적 맥락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내가 신봉하는 종교만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은 유보되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어떤 영적 불편함을 수반한다고 해도, 그래야만 종교적 타자(타 종교)를 그 종교적 타자 자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3) 여러분이 현재의 기후 변화를 포함하여 생태 위기 전반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인간이 이 자연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명시적인 혹은 암묵적인 가설은 판단중지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태 문제를 인간의 필요나 이해관계가 아닌 생태 체계 자체의 틀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후설이 말하는 판단중지와 환원은, 사물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그치고 그 사물의 본 면목을 보라는 불교의 지관(止觀)법 내지 사마타/위빠사나 수행법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판단중지는 본질 파악으로, 본질 파악은 실천적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불교 종립학교를 다니는 우리 학생들이 일상적 상황에서든 학문적 맥락에서든 판단중지의 이념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을 각자의 상항과 맥락에 맞추어 현명하게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