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영 불교대학 강사
▲오진영 불교대학 강사

 

몇 주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나는 지금까지 ‘판단’이라는 말을 곱씹고 있다. 

그 당시, 죽음을 맞이하고 계시는 아버지는 가쁜 호흡을 하다 이내 멈췄다. 

119에 전화를 걸어 안내에 맞춰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자, 어머니는 “생명연장거부자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과 함께 응급센터 직원의 “그렇다면 멈추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난 갈라지는 마음 사이에서 결정 지어야 했다. 

‘그래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해야 할까.’ 그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결국 ‘보내드려야 한다’라는 마지막 ‘판단’으로 아버지의 귀에 인사를 드리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며 보내드렸다.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판단은 과연 얼마나 올바를 수 있을까. 

판단은 자신의 ‘앎’에 의해서 나온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진정 올바른 앎을 토대로 판단 내리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 올바른 앎으로 안내하는 학문이 불교인식논리학, 즉 인명학(因明學)이다. 

인간은 하루에도 수없이 선택하고 판단한다. 오늘의 옷차림, 누군가의 표정, 일의 결과, 심지어 밥을 먹을지 말지까지.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판단의 대부분은 ‘내가 내린 것’이라기보다 이미 몸과 마음에 새겨진 습관과 기억이 내린 것이다.

참된 판단은 감정이나 편견이 아니라 합리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종종 “느낌상 맞는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인명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인식의 오류일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논리학은 늘 묻는다. “너의 판단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일상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친구의 표정이 어두우면 우리는 곧바로 “기분이 나쁘구나”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 판단은 근거가 약하다. 단지 ‘예전에 저런 표정을 지었을 때 기분이 나빴다’라는 기억을 불러온 것일 뿐이다.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늘 습관적 비유와 추론의 틀 속에서 작동한다. 

불교인식논리학은 결국 ‘자비로 향하는 앎의 길’이다. 논리의 형식은 지혜로, 지혜는 다시 연민으로 이어진다. 삶의 판단 하나하나가 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렇기에 판단을 바르게 하는 것은 곧 마음을 자비롭게 쓰는 일이다.

하루의 끝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했는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도 나는 이제 조금은 다르게 세상을 보려 한다.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눈, 그것이 불교인식논리학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큰 자비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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