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런던베이글뮤지엄에서 일하던 20대 청년 A씨가 주 80시간에 달하는 과로 끝에 사망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초 보도와 함께 국내 언론·SNS는 A씨의 사진, 출퇴근 사실이 적힌 메신저 내용, 재직자들의 폭로 등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3일, 런던베이글뮤지엄 측이 유족과 합의에 이르며 산재 신청이 취하됐다. 사측은 A씨의 산재가 인정될 경우 지급될 보상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위로금 명목으로 유족에게 지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각에서는 “결국 돈이었다”나 “유족이 돈을 밝혔다”는 식의 냉소적인 말들도 이어졌다.
개인과 기업 간 법적 다툼은, 개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 처절하고 외로운 싸움이다. 유족은 죽음이 업무상 재해임을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하고, 유족의 기약 없는 법적 자문과 법정 출석 횟수는 쌓여간다. 그 긴 싸움을 버텨내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 감정적 소모는 누구도 보상할 수 없다.
흔히 노동자와 기업 사이 갈등이 발생하면 “법으로 해결하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법적 해결’이 실제로 얼마나 걸리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의 역학조사 기간은 2020년 평균 275.2일서 2023년 588.8일로, 같은 해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 기간은 평균 441.4일에서 699.8일로 길어졌다. 결과를 기다리다가 숨진 노동자는 지난 6년간 100명이 넘었다. 개인이 마주한 법의 민낯은 공정한 심판자가 아니다. 합의를 선택한 유족에게 기약 없는 싸움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의를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아쉬움이 아닌 2차 가해인 이유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법과 구조의 정당성에 대해 반문해야 한다. 노동자와 유족을 탓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같은 문제를 묵인하게 한다. ‘합의’라는 단어에만 몰두해 사건을 바라보기보단 유족이 합의에 도달하게 되는 그 과정과 구조에 집중해야 한다. 열쇠는 산재 처리에 걸리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 정신적 부담이지 유족의 도덕성이나 욕망에 있지 않다.
“법대로 하자”. 쉽게 마주하는 이 말은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약자가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지우는 무심함일 수 있다. 우리는 법에 얽매이며 사고를 멈추는 대신, 이 비극과 합의가 의미하는 바를 곱씹어야 한다. 법의 울타리를 넘어 무엇이 더 나은 방향인지, 무엇이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일지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