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고 일을 하지 누가 죽으려 일터에 나가는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산업재해와의 긴 악연을 끊기 위한 새 정부의 노력에 깊이 공감한다. 불시 점검과 강력한 제재 조치는 전례 없는 효능감을 유발한다. 그러나 어렵고 위험한 일일수록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는 구조가 한순간에 끊기지 않는다면 혁명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25년 8월 19일 오전 11시경 경북 청도군에서 발생한 열차 사고로 선로에서 일하던 하청업체 소속 직원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지 않았던가. 기대와 절망이 한 치 앞도 모르게 반복되는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이 아니다. 법이 그러한데, 자본가가 법보다 앞서 ‘도덕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청을 통해 제반 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가능한 한 최소 인원을 고용하는 것도, 여러 업체를 경쟁시켜 원가를 줄이는 것도 모두 불법이 아니다. 이 합법적 경계선은 노동 현장의 위험을 매우 ‘개인적인’ 주의와 부주의의 몫으로 떠넘길 수 있다. 모세혈관처럼 퍼진 이 수많은 합법 너머의 잠재적 위험들을 오직 감시와 제재만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노동 안전을 위한 법과 함께, 사회 전반의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즉, “살려고 일을 하는” 노동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해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거친 적이 없었다. 이제 그 역사의 오류를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를 성찰해야 한다.
첫째, 노동의 가치를 재정의하라. 노동의 본질은 단순히 임금을 받는 행위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보람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땀의 대가에 목숨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자가 재충전하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곧 황금알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주 4일제 근무와 같은 논의는 단순히 노동 시간 단축을 넘어, 일에 압도되지 않고 삶과 회복의 시간을 확보하는 새로운 사회적 전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둘째, ‘보이지 않는 노동’을 인정하고 존중하라. 오직 가시적인 노동의 결과물만 중요시하며 최적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이윤 중심의 노동 가치 평가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 현장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의 헌신이 존재한다. 그 어떤 헌신도 당연하지 않으며, 그 가치를 배제하고 오직 효율성만 추구하는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아가 노동자의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도록 하는 것, 아플 권리와 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기업과 사회의 책임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셋째, 혐오와 낙인 대신 연대의 문화를 복원하라. 노동자의 고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다. 그들의 목소리를 ‘불편한 소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목적으로 노동조합을 ‘건폭’과 같은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상징적 폭력은 노동자의 고통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비도덕성으로 치부하며 사회적으로 지워버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연대를 통해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고,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것이다.
결국 산업재해는 ‘숨은 노동의 가치’를 외면하고, 타인의 죽음과 위험에 ‘무감각’해지며, ‘혐오의 정치’에 물든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거울 앞에 마주 서서,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며 진정한 공감과 연대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