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동아리 ‘손짓사랑회’에서 꿈 키우기 시작해
뉴스, 강연뿐 아니라 공연 수어통역에도 활발히 참여
“수어는 모두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사회를 위한 도구”
말이 닿지 않는 곳에 손이 닿는다. 누구에게는 당연한 정보가 누군가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현실일 때, 그 사이를 조용히 메우는 이들이 있다. 수어통역사 최황순 동문(산업공학 93)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28년 동안 뉴스부터 공연 무대까지, 손의 언어로 농인의 더 넓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돼왔다. 소리 없는 언어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최황순 동문을 만났다.
Q. 안녕하세요, 최황순 동문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동국대학교 산업공학과 93학번 출신 수어통역사 최황순입니다. 현재는 1인 수어통역 전문회사인 ‘구리사인’을 운영하며, 다양한 현장에서 수어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대학 시절 수어를 처음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경험이 지금의 진로로 이어지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축제에서 우연히 수어 동아리 ‘손짓사랑회’를 알게 된 것이 시작이었어요. 처음 본 수어는 언어라기보다 마치 퍼즐이나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죠. 손동작 하나하나에 질서와 규칙이 있다는 점이, 이과 과목을 좋아하던 제게는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손끝으로 푸는 암호 같다고 할까요. 그 매력에 이끌려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고, 기초 수어를 배우면서 점차 수어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알아가게 됐습니다. 이후 더 높은 난이도의 수어를 배워가며 교내 수어 행사뿐 아니라 외부 통역 활동에도 참여했어요. 그러면서 수어통역을 진로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흘러 1997년, 수어통역사 자격시험이 처음 시행됐고 외부 수어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그때부터 수어통역사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여정을 이어오고 있어요.
Q. 공연 수어통역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데요. 공연 수어통역은 뉴스나 강연 통역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A. 뉴스나 강연 통역에서는 핵심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하지만 공연통역은 그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대사를 옮기는 걸 넘어 배우의 감정선, 이야기의 복선, 무대의 호흡까지 수어로 함께 전해야 하거든요. 연극, 뮤지컬 등 공연에서 농인 관객은 배우뿐 아니라 수어통역사도 함께 봐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이중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통역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죠. 특히 연극에는 언어유희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배를 사줘’ 같은 대사도 문맥에 따라 ‘먹는 배’일 수도, ‘타는 배’일 수도 있죠. 이런 중의적 표현을 상황에 맞게 풀어내야 농인 관객도 함께 웃고 감정에 감정을 나눌 수 있어요. 또한 수어는 시각 언어라 말보다 정보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공연 속 복선이나 반전 같은 요소가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각색’ 과정이 필요하죠. 이런 섬세한 조율이 공연 수어통역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공연 수어통역을 위한 무대 연습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A. 공연 스타일에 따라 수어통역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요. 첫 번째는 ‘쉐도잉’ 방식으로, 배우의 동선을 따라 무대 위를 함께 움직이며 수어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농인 관객이 배우와 통역사를 동시에 볼 수 있어 몰입감이 높지만, 그만큼 배우와의 호흡과 동선을 맞추는 연습이 매우 중요하죠. 두 번째는 ‘구역 설정 방식’입니다. 무대 한쪽에서 통역하는 방식인데, 이 경우에는 어디에 서야 잘 보일지, 장면이 바뀔 때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빠질지 등을 미리 계획해야 해요. 또 하나 중요한 건 통역 시점을 조절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배우의 장면이나 대사를 관객이 먼저 인지한 뒤, 수어로 내용을 전달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거든요. 결국 공연 수어통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배우와 함께 무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Q. 지금까지 참여하신 작품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제 첫 작업이었던 연극 「프레드」입니다. 영국의 장애인 배우들이 소속된 극단이 한국에 와서 공연한 작품이었는데, 처음에는 수어통역사 한 명만 요청을 받았어요. 하지만 인물 간의 관계가 복잡해서 혼자 맡기엔 무리라고 판단했고, 두 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설명해 결국 설득에 성공했죠. 그 공연을 본 농인 관객분들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이후 다양한 공연에서 수어통역을 요청받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또 인상 깊었던 작품은 「햄릿」이에요. 번역 작업에만 6주가 걸릴 만큼 손이 많이 간 공연이었죠. 특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한 문장을 두고 세 시간 넘게 논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매해 새 작품을 만나고 있지만, 쉬운 공연은 단 한 편도 없었어요.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입니다. 작품마다 통역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죠.
Q. 공연 수어통역을 하시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A. 농인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고 “정말 잘 이해됐어요”라고 말씀해 주실 때, 그보다 더 기쁜 순간은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 「7분」이라는 연극에 수어 자문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열한 명의 노동자가 쉬는 시간을 줄이는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이야기인데, 결말이 열린 채로 끝나는 작품이었죠. 수어는 시각 언어라 추상적인 표현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농인 관객분들께서 “결론은 어떻게 된 거예요?” “합병된 건가요?” 하며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했어요. 전반적인 맥락과 상징을 충분히 이해하셨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순간마다 제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같은 무대를 함께 호흡하고 경험했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깊은 울림으로 남습니다.
Q. 재난 방송이나 속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수어통역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A. 가장 중요한 건 정확성과 신속성의 균형이에요.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정보 전달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두 요소를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하죠. 수어는 시각 언어라서, 손의 위치나 방향이 조금만 바뀌어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단순히 빠르게만 통역해서는 안 되고 상하·좌우 같은 공간 정보까지 정교하게 조율해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농인분들은 경보음이나 알람 같은 청각적 신호를 바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위급 상황에서는 그런 정보를 눈앞에 펼쳐주듯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수어통역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재난 상황은 대부분 갑작스럽게 찾아오잖아요. 그 순간 얼마나 신속하게 판단하고 동시에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저는 늘 ‘신속하되 정확하게’라는 원칙을 가슴에 새기며 통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Q. 차별 없는 관람 환경을 지향하는 배리어프리 공연에 참여하고 계신데요. 이러한 공연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어떤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A. 현재는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 같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정부나 지자체 예산을 통해 배리어프리 공연을 일정 부분 지원하고 있어요. 덕분에 수어통역사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농인 관객분들도 공연을 관람할 기회를 얻게 됐죠. 하지만 그 지원이 농인분들의 ‘문화적 선택권’을 충분히 보장한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예산이 대형 공공극장에 집중돼 있다 보니 다양한 소극장 공연에는 적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지금도 수어통역이 포함된 연극이 한 달에 두세 편 정도 열리지만, 그 정도로는 선택의 폭이 너무 좁습니다. 소극장 고유의 밀도 있는 감정, 배우와 관객이 가까이 호흡하는 생생한 현장감 역시 농인 관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폭넓고 세밀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로 소극장에 일정 금액을 지원하거나,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은 배리어프리 공연의 날’처럼 정기적인 운영 체계가 마련된다면 접근성은 물론 문화적 다양성 측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을 거예요.
Q. 최근 K-POP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수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흐름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나요?
A. 예전에는 수어로 노래를 통역하는 것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어요. ‘음악은 청각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최근 BTS를 비롯한 K-POP의 세계적인 확산과 함께, 음악을 ‘보는 감각’으로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고 느낍니다. 공연 무대에서 수어를 활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면서,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감정과 리듬을 담는 하나의 시각 언어로 자리 잡고 있죠. 이처럼 수어가 예술 안에서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언어로 인식되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수어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도 함께 자연스럽게 확장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문화적 시도는 수어라는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돼요. 수어가 법적으로도 제2공용어로 인정된 만큼, 앞으로는 더욱 다양한 무대와 콘텐츠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언어로 자리 잡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 수어통역사로서 어떤 활동을 이어가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A.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실제 통역 경험을 쌓을 기회가 부족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는 후배들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후배 통역사들이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배로서 그들이 다양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제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이자 과제입니다. 저 혼자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거든요. 또한 앞으로는 수어통역뿐 아니라 후배 양성, 연극 통역 디렉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 분야 안에서 역할을 확장해 나가고 싶어요.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과 현장 경험을 누군가의 시작을 도울 수 있는 밑거름으로 쓰고 싶습니다.
Q. 수어를 통해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으신가요?
A. 수어는 농인들이 신체적 제약 없이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자유의 언어’라고 생각해요. 이 언어가 더 널리 사용돼서 농인분들도 교육, 취업, 문화생활 등 다양한 영역에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어통역사에 대한 인식과 처우도 함께 개선돼야 해요. 수어통역사는 단순히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와 사람, 감정과 감정을 연결하는 ‘언어 전문가’이자 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기 때문이죠. 이 역할이 존중받고, 전문성에 걸맞는 환경이 갖춰질 때 이 일이 지속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수어가 일부를 위한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고 싶습니다.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손끝으로 이야기를 건네온 최황순 동문. 그의 수어는 침묵의 틈을 메우고, 세상과 단절된 순간들 위에 조용히 다리를 놓는다. 손짓 하나, 시선 하나에 담긴 마음은 더 깊은 울림이 돼 다가왔고, 그 울림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수어가 더 이상 소수만을 위한 언어가 아닌, 모두가 함께 나누는 삶의 언어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는 최황순 동문. 다름은 이해로, 고요함은 연대로 물들이는 그의 힘찬 손짓을 동대신문이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