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세상을 향해 디딘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마음은 안녕하는지, 어떻게 지내시나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어느덧 물이 한두 방울씩 스며들던 지붕이 마르고 누그러든 햇살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무언가 쓸쓸한 마음이 조금 채워갈 무렵, 어떤 낯선 감정들이 밀려들겠지만, 마음보다 계절이 빠른 요즘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하는 말은 입에서 맴돌다 흩날리고,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출발지조차 모르는 첫 외침들은 서툰 발걸음만큼 때로는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4월입니다. 겨울의 끝, 다른 이름은 봄입니다. 계절의 틈새를 벌려 엿보고 싶은 지난 계절의 미련이 떠오릅니다. 춥다 하면서도 어느덧 무더워지는 기운 앞에서 겨울이 완전히 지나갔다는 것을 몸소 느낍니다. 서리고 추상같든, 찬란하고 순백이었든 그 겨울도 지나고 나면 묵음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도 반드시 겨울은 오겠지만, 그때의 겨울은 그 겨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겨울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겨울 앞에서 다시 흔들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겨울이 가장 추웠다고,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봄이어서, 스물이어서, 으스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지금이기에 좋아해 봅시다.
제 대학생활은 온 세상이 하얀 마스크를 쓴 채 텅 빈 시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복학 후 첫 대면 등굣길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봄날 아침, 가지런히 흐드러지게 핀 겨울눈 사이 풋내길을 걸어가는 24학번이 보았습니다. 왜인지 그 사람과 걸음을 나란히 할 자신이 없어서, 한참 거리를 두고 먼발치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뒷모습만을 쫓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꿈꾸던 시간 속에 사는 그 사람이 부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는 꿈속에서라도 그 순간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연등불 아래서 주인없는 통기타를 꺼내어 조용히 노래하던 모습을, 그리고 스트링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와 어느새 자리 잡은 작은 라일락 꽃잎을 조심스럽게 꺼내 가만히 바라보던 그런 순간을 말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 역시 첫 번째 순간을 품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동악(東岳)로의 푸른 봄은 언제나 다시 돌아옵니다만. 대학이라는 출발점에 첫 발을 내딛던 그때의 저는, 그 순간들이 오직 저만의 청춘(靑春)의 서(序)가 되길 바라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지금은 참으로 빛나는 시간입니다. 아마 올해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있습니다.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한 시간, 후텁지근한 여름날 공강 때 공원 정자에서 혼자 맥주 두 캔과 과자를 먹으며 들었던 벌레 울음소리 같은. 아니면 정신 없이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 같은, 혹은 대동제 주점에서 취한 채 차가운 아이스크림 한 조각 씹을 때의 느낌 같은.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찰나의 순간들이 내 눈동자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그 첫 순간들.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대학생활의 서(序), 첫 번째 스물의 나날인 대학교 1학년의 기억은 분명 정말로 값지고 은은하게 남을 거라 믿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지금, 많은 마음이 뒤섞여 있겠지만, 이 순간이 언젠가 가장 빛나는 기억이 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학창시절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며, 이제는 그 기억을 품고 더 많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대학생활이 그 길 위에서 찬란히 빛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을 떠올리며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새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25년 봄,
당신 앞에서, 혹은 당신 옆에서 천천히 길을 걷는 안세중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