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핸들을 돌리며 도심을 질주하는 흑인 청년 드리스. 그 옆에는 전신마비를 가진 백인 남성 필립이 앉아 있다. 속도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히는 순간, 필립은 갑작스럽게 거품을 물며 발작을 일으킨다. 경찰이 당황해 길을 터주고 떠나자, 그는 입을 닦으며 태연하게 말한다. “드리스, 어서 운전면허부터 따” 두 사람은 웃으며 다시 도로 위를 달리고, 여느 신파 영화처럼 감동적으로 전개될 것 같던 흐름은 한순간에 유쾌하게 뒤바뀐다. 첫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모두의 예상을 뒤집은 이 영화는 장애인을 향한 대중의 시선을 가볍게 비튼다. 장애인과의 관계를 ‘동정’이 아닌 ‘동등’한 시선으로 풀어낸 영화, 바로 「언터처블: 1%의 우정」(이하 「언터처블」)이다.
완벽한 타인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기까지
전신마비를 앓는 상위 1%의 백만장자 필립은 새 간병인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이어가던 중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 지원자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을 마주한다. 그의 이름은 드리스, 형식은커녕 무례할 정도로 거침없다. 그러나 그 투박함 속. 천진성에 매력을 느낀 필립은 한 달간의 고용을 제안하고, 드리스는 호화로운 저택과 욕조에 마음을 뺏겨 흔쾌히 수락한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동거는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드리스는 필립의 식사를 돕다 엉뚱한 곳에 포크를 들이밀거나, 필립이 팔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전화기를 건넨다. 그러나 드리스는 한밤중 통증을 호소하는 필립을 데리고 파리 시내를 거닐며,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터놓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세계에 발을 들인 그들은 조금씩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연다.
영화 「언터처블」은 완벽한 대칭점에 있는 두 인물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나이와 인종, 교육 수준, 심지어는 음악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드리스는 팔과 다리를 쓸 수 없는 필립을 결코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필립 역시 낯선 이방인인 드리스를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서로를 ‘불쌍한 장애인’이나 ‘문제적 이민자’로 보지 않을 때, 두 사람 사이엔 진정한 우정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99%의 차이를 지닌 두 사람은 점차 사회적 경계를 허물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99%의 차이를 잇는 시선의 동등함
우리 사회는 종종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 혹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곤 한다. 배려라는 이름 아래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일쑤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인을 향한 색안경을 깨부순다. 드리스와 필립의 관계는 일방적인 보호도, 시혜도 아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서로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한다. 드리스는 전신마비를 앓는 필립의 손과 발이 돼주지만, 영화는 필립을 결코 수동적이고 무력한 인물로 그려내지 않는다. 필립은 드리스에게 노동의 가치와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삶의 의미를 전한다. 이처럼 영화 「언터처블」은 장애를 주제로 하지만 감동을 강요하지도 연민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각자도생의 가치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 우리는 과연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타인을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기에, 누구나 살아가면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렇기에 장애인을 나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구분하기보다 동등한 개인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양한 이들이 함께 모인 대학 사회에서도 서로의 차이를 외면하기보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해의 순간과 포용의 관계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