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우 정치외교학전공 23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엔 장애를 가진 이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가 있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내 주위에는 함께 오목을 두던 거동이 불편한 친구가 있었고, 마트에는 미소 지으며 간식하나를 더 챙겨주시던 청각 장애인 아저씨가 있었다. 등굣길 내게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말씀해 주시던 문방구 할아버지와 살갑게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10대의 초반, 그렇게 나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의 공존을 배워 나갔다. 

그 나이 땐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기 어려워서일까. 철이 없던 초등학생 친구들은 구구단을 잘 외우지 못하는 a, 피구 게임에서 실수를 한 b를 ‘장애’라 표현하며 놀려대곤 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철없고, 어리숙한 어린 나이인 '10대'라는 방패막이 있었기에 세상은 이들의 행동을 크게 질책하지 않는 듯 싶었다. 

한편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철없는 이들은 여전히 철들 생각이 없었다. 사담방에서, 술자리의 뒤편에서, 학내 커뮤니티 내에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장애인을 혐오 표현으로 사용하는 상황은 비일비재했다. 내 이웃 주민, 내 친구의 현실이었던 ‘장애’는 여전히 게임을 잘하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친구에게, 재미있는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되어 쓰이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미성숙’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장애를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에 있다. 당신은 장애인을 나와 분리된 세상의 타인이자 도움을 주어야 할 시혜적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1945년 신체장애인고용주간을 제정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폴 스트래챈은 장애인에 대해 ‘시혜와 동정’이 아닌 ‘차별과 권리’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장애를 시혜와 동정이 아닌 차별과 권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장애를 혐오 표현으로써 사용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공감 부족의 영역이 아닌, 타인에게 ‘차별적이고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만약 당신이 장애를 희화화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대학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장애 학생의 이동권을 위한 지도 마련, 수업 대필 도우미 및 속기사 지원, 우선 수강 신청제도 등 학내 배리어프리를 위한 여러 제도적 방침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학내 배리어프리가 온전히 실현되고 있느냐를 묻는다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일 것이다. 제도적 방침만으론 ‘배리어프리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 마일리지를 쌓기 위해 장애인식교육 영상을 틀어 놓는 행위가 배리어 프리를 실현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그 예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들을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제도와 정책이 마련되어도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인식의 변화 없이는 배리어프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마음속의 장벽, 즉 장애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먼저 허물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배리어프리를 ‘마음의 배리어프리’로 부른다고 한다. 이는 기구나 시설, 제도를 통해 충족될 수 없는 배리어, 즉 장벽을 사람의 마음으로 채워나간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마음의 배리어프리라고 말한다. 

이번 학기 우리는 16명의 장애 학우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장애에 대한 성숙한 시선이 동반된 마음의 배리어프리를 실현해야 한다.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나의 친구, 나의 학우, 나의 이웃인 그들과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 평화의 공존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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