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어느 가족」의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영화「어느 가족」의 포스터 (출처=네이버 영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난 혈연으로 엮인 관계, 같이 사는 구성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부모님이 태어나셨던 1960년대에만 해도 가정 형편은 어려울지라도 김치찌개 하나로 따뜻하게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족이란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해석될까.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도 버거운 시대가 돼버린 만큼 ‘가족’ 간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족에 대한 영화다. 도쿄 외곽에서 고령의 할머니인 하츠에, 남편 오사무와 아내 노부요 부부, 그들의 딸 아키와 아들 쇼타, 작은딸 유리까지 6명의 풍족하진 않지만 단란하게 사는 가족을 그린다. 하지만 영화의 원제목을 보면 만바키(万引き家族), 즉 좀도둑 가족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로 표현돼있다. 사실 이 6명은 ‘진짜 가족’이 아니다.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오사무 가족이 팔에 화상 자국이 있을 정도로 심하게 학대를 당해온 아이를 구해주고 새로운 가족의 품으로 오게 한 걸 알지만, 사실상 그들은 ‘유괴범’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리는 나중에 자신의 실종 소식이 뉴스에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다. 심지어 자신의 원래 이름보다 노부요가 새로 지어준 ‘린’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한다. 유리를 구해줬음에도, 유리가 원래 가족보다 새로운 가족의 품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게 된다.

분명 옳은 관계는 아니다. 아이에게 물건을 훔치는 법을 알려주는 게, 노부요와 오사무는 원래 내연 관계였다는 게, 할머니가 노령으로 죽게 됐을 때 가정 상황이 드러날까 봐 신고도 못 하고 땅에 묻게 된 것도. 영화를 보는 내내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질타를 받아 마땅하지만, 질타를 받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유리에게 진정으로 사랑이란 걸 알려줬던 사람들이었기에.

영화 후반부엔 모든 가족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말하는 ‘올바른’ 환경으로 돌아갔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자세히 그려져 있지 않은 걸 보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위탁 시설로 돌아간 아들, 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딸 그리고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5년 징역을 받게 된 노부요를 바라봤을 땐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되는 결말보다도 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감독은 사회적 불황과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점차 사라져가는 ‘가족’ 간 연대 관계를 냉철하게 꼬집는다. 실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이들은 ‘어느 가족’들보다도 서로 행복했을 것이다. 이들을 정의감과 사회적 기준에 따라 사기꾼으로 전락시키기 전까진 말이다.

“아이를 낳아야만 엄마인가요?” 경찰 조사 도중 노부요가 내뱉은 말이다. 이어 취조자가 두 아이들은 그녀를 뭐라고 불러왔냐는 물음엔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며 별대른 말을 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그 6명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조차 없었다. 그렇게 단란하게 지내왔지만 정작 가족처럼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봐야겠다.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엄마, 아빠, 할머니라 불리는 법적인, 혈연으로 불리는 것만이 진짜 가족일까? 취조자가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지만 시부요는 그건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끈끈한 정(情)으로 이어져 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우리도 모르게 사회적 가치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진짜 가족’들의 삶을 부수고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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