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기 전 잠시 남은 시간, 혹은 친구를 기다리며 생긴 시간의 틈이 있으면 나는 늘 가까운 서점으로 발길을 옮긴다. 새 책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서 신간 코너를 훑어보는 게 작은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몇 해 전에도 그렇게 서점에 들렀다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니,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목이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그 제목의 책은 기억 속에 ‘귀여운 제목의 에세이’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무심코 켜둔 네이버 뉴스 화면 속에서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를 펼치면 의문이 든다. 이론서인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등장인물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 역자 해제까지 살펴봐야 비로소 이 책이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인류학자의 사유와 삶이 중첩된 에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제는 이 책에서 인류학이 더 이상 ‘먼 곳’에 있는 타자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님을 강조한다. 대신, 우리가 살고 있는 익숙한 공간들-플랫폼, 병원, 콜센터, 공항, 임시 체류소와 같은 ‘비장소(non-place)’-이 새로운 관찰의 장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
『푸른기록』은 염색가 신상웅이 푸른색과 화포의 흔적을 쫓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작품이다. 화포란 진한 푸른색 바탕에 흰 무늬를 넣은 무명으로, 도공이 그릇에 무늬를 새기듯 염색가가 물들인 낱낱의 천에다 남긴 푸른 기록이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져버린 그 기록의 그림자를 따라, 신상웅 작가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 일본의 오지와 도시를 십여 년에 걸쳐 찾아간다. 신상웅 작가는 충북 괴산에 살며 염색을 한다. 색 중에서도 ‘블루’, 더 정확히는 ‘인디고 블루’라고 불리는 푸른색이 주 종목이다. 봄에는 씨를 뿌려 쪽을 기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관장 서봉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주지 호 산스님)는 봉선사 본·말사의 불교문화유산을 조망하는특별전 를 개최한다. 봉선사는 969년(광종 20)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운악사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예종 때 세조의 능인 광릉을 수호하는 능침사찰로 중창되며 오랜 기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경내에는 1469년(예종 1) , 1735년(영조 11) 등 조선왕
15년 차 아트디렉터 박주희의 10년간의 뉴욕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거대 도시 뉴욕을 하나의 브랜드로서 큐레이팅한 『뉴욕의 감각』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아트디렉터가 바라보는 뉴욕의 다채로운 매력을 총 4챕터에 걸쳐 주제별로 큐레이팅했으며, 감각적인 뉴욕의 공간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생동감 넘치는 사진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뉴욕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전달해준다. 챕터 1 ‘공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에서는 브로드웨이, 메이시스 백화점, 뉴욕의 독립서점 등 뉴욕 특유의
며칠 전의 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가는 길에, 수박처럼 생긴 공을 하나 봤다. 초록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공이었다. 바람이 불자 공은 굴러갔다. 나는 물끄러미 굴러가는 공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움직이는 공을 따라서 함께 움직였다. 공의 동선과 나의 동선을 같게 했다. 공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동네에 이렇게 커다란 나무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였다. 공은 턱, 하고 그 커다란 나무와 한 번 충돌하더니, 그대로 정지했다. 지금이
틸란드시아 이오난사는 흙이 없어도 공기 중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며 자란다. 뿌리내릴 흙 한 줌 없는 텅 빈 허공에서도 죽지 않고 자라서 꽃을 피운다. 남지은의 첫 시집 『그림 없는 그림책』은 사람도 그렇다고 말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애써 모았던 흙 한 줌마저 빼앗긴 지금의 상처가 자신이 가진 전부인 듯해도, 분명 자란다고. “그림을 망치고 우는 아이” 같은 누군가가 눈물을 그치기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 주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물론 현실은 행복과 환상으로 지어진 온실이 아니다. 단단하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세상 모든 기억의 총합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진 인물 ‘푸네스’가 등장한다. ‘푸네스’의 매우 구체적이고 항구적인 기억은 당장 3시 14분에 본 개의 이름을 3시 15분에 똑같이 불러줄 수 없을 만큼 비옥한 세계를 축조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자신의 기억을 ‘쓰레기 더미’로 표현한다. 그 표현에는 왜곡의 틈입을 불허하는 완벽한 기억이 오히려 삶의 일반 원리와 공존하기 어렵다는 보르헤스의 믿음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참을 수 없이 정밀하고 순간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지켜보는”* 자가
서사가 넘쳐나는 시대,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고 전前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한다.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이 비켜난 자리는 세일즈가 차지한다. 스토리텔링 시대의 소비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약속받고 서사를 소비한다. 이른바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다. 서사의 위기란 우리 삶에 촘촘히 들어앉을 가능성으로써 저 멀리서 오는 지식으로의 서사 대신 우리 삶을 점령한 휘발성의 정보와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된 힘없는 서사들에 대한 일갈이다.* 이런 서사의 위기는 예술 전방위에 공유될 위협이기도 한바.
번역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근사한 책이 나왔다.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애나 칭의 책이다.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제목만 보면 조금 아리송하기도 하다. 버섯과 ‘자본주의의 폐허’, 그리고 ‘삶의 가능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적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버섯이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글쓰기, 심지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저자는 작고 미묘한 사물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버섯을 이해하
에두아르 르베는 『자살』의 원고를 출판사에 송고한 직후, 파리에서 자살했다. 그 때문인지 ‘자살’은 소설의 내용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완성한 형식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자살이라는 현실에서의 행위가 정확히 어떻게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 짓는다는 것일까.르베의 또 다른 소설 『자화상』이 온통 “나는”으로 시작되는 거대한 자기 묘사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자살』은 자살한 ‘너’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이들 ‘나’와 ‘너’는 내용상 많은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서로 겹치는 『자화상』의 ‘나’
게오르그 루카치의 그 유명한 서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문장이 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소설이 ‘길 찾기’와 모종의 관련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다른 틀로 형식화되는 것 같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적 공간의 특징을 “인식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초월*”했다는 것으로 정식화했다. 즉 근대의 문제가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나의 관계를 잃었다’라는 것이라면, 포스트모던의 문제는
족보는 부계적 가족 질서의 가장 질기고도 강력한 상징이다.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하는 족보는 뿌리처럼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넓게 퍼져간다. 마치 수면 아래로 내려앉는 그물처럼 넓게 퍼지는 가계도는 후대의 삶을 옥죄는 수직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부계혈족의 경로를 따라 내려오는 역사의 압력은 한국 문학에서 수없이 변주돼 왔다. ‘아버지 없는 세대’로 불린 이들이 만들고자 했던 새로운 계보였고, 때로는 전쟁과 학살의 은폐된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재현의 우회로였다. 그리고 오늘날 부계혈족의 수직적 가계도는 가부장제의 억압을 전복하는 여성 가
기후변화가 다양한 요인에 의한 지구 평균 기온의 변화를 일컫는 용어라면, 지구온난화는 산업혁명 이후 인위적인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한 기온 상승을 가리킨다. 2000년대 이후 이러한 용어가 근 백여 년간 인간의 행위가 초래한 변화의 심각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지질학적 용어와 더불어 기후 위기(climate crisis)나 기후 비상사태(climate emergency)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근 전 세계를 덮친 팬데믹, 전에 없던 규모의 산불과 자연재해의 증가, 기록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멈춰 세웠던 일이 한없이 낯설고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것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일상으로의 회복 역시 어딘가 어색하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 다행이라 여기고 반겨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영 기쁘게만 다가오진 않는다. 그토록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숱한 어둠과 죽음의 기억들조차 머지않아 곧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걸, 심지어 재빨리 지워내고 싶어 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 새겨진 이 생존에의 명령은 가혹하다. 그러나 그 가혹함 덕분에 우리는 번번이
최유안의 오피스 소설은 이미 첫 번째 소설집 『보통 맛』(민음사, 2021)에서 만나본 적이 있다. 표제작 「보통 맛」은 회사 구성원으로서 또 좋은 선배로서 보통 이상이고 싶었으나 ‘보통 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나서야 씁쓸하게 사그라지는 한 개인의 인정 욕구를 세밀하게 그려낸 소설이었다. 장편소설 『백 오피스』는 여러 면에서 「보통 맛」의 확장판이다. 작가의 경험이 묻어난 핍진한 서술도, 세 명의 여성 인물이 보여주는 일에 대한 열정도, 그 이면에 쌓여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 깊은 층
한강의 신간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 속 서술자인 소설가 ‘경하’가 놓인 정서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경하는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역사적 학살의 기억을 소재로 출간한 자신의 전작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있다, 그 소설을 써 내려가며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종의 정신적 후유증으로 인해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무기력증에 견디며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진다. 한강의 전작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환기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구도
대부분의 좋은 학술서는 모르던 사실이나 현상을 정련된 언어와 엄밀한 논증으로 비춤으로써 시야의 확장을 선사한다. 어떤 좋은 학술서는 내가 잊고 있거나 사소하게 치부하던 과거의 체험을 소환하여 나와 내가 선 ‘현재’를 반추하게 한다. 일본 불교대학교 최은희 교수의 최근저서 『韓国のミドルクラスと朝鮮戦争: 転換期としての1990年代と「階級」の変化』는 내게 후자의 경험을 선사했다. 이 책은 1987년 직후 한국사회 전환기를 중산층(middle class) 중심의 사회문화적 재편과정으로 제시한다. 전환기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민주화 직후 전환
오늘날 한국문학계에서 문학사(文學史)는 케케묵은 방법이자 반성과 해체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한국문학 연구에서 문학사란,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로 대표되는, 문학사에 대한 의존과 탈주 사이의 주제론적 난반사의 향연이 된 지 오래다. 이는 딱히 부정적이거나 애석해야 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문학사’ 대한 한국문학계의 도전은 그 자체로 ‘민족문학사’ 수립을 합리화했던 사회적·정치적 내러티브와 에피스테메가 점차 타당성을 상실하는 방향에 대한 고민과 응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천팡밍(陳芳明)의 『타이완신문학사』는 ‘민족문학사’라는
코로나 한국과 타이완의 현대사는 비슷한 궤적을 그려왔다.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난 전후 동아시아의 반공 분단국가, 고도성장을 이룬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 심지어 1987년을 기점으로 ‘민주화’에 이르는 과정까지. 두 지역의 현대사는 양자 간에 모종의 평행이론이 성립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빼닮았다.이처럼 한국과 타이완은 역사적으로 그 어느 지역보다 깊은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을 이유가 차고 넘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두 지역은 각자의 분단 문제와 씨름하는 와중에 냉전 시대 형성된 유구한 정치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