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판야, 『게에게 홀려서』, 장지연 옮김, 미우, 2020.

△ 사진= 교보문고
△ 사진= 교보문고

  며칠 전의 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가는 길에, 수박처럼 생긴 공을 하나 봤다. 초록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공이었다. 바람이 불자 공은 굴러갔다. 나는 물끄러미 굴러가는 공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움직이는 공을 따라서 함께 움직였다. 공의 동선과 나의 동선을 같게 했다. 공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동네에 이렇게 커다란 나무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였다. 공은 턱, 하고 그 커다란 나무와 한 번 충돌하더니, 그대로 정지했다. 지금이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멈춰 있는 공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공에 작게 금이 가 있었다. 금이 만들어낸 틈 안쪽으로 붉은색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공이 쩌저적하는 소리를 내더니 두 쪽으로 갈라졌다. 보이는 단면에 검은 씨가 박혀 있었다. 지금껏 내가 쫓은 것은 공이 아니라 수박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갈라진 수박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갈라진 수박을 먹었다. 수박은 시원하고 맛있었다.

  바람에 굴러갈 정도로 가벼운 수박이 나를 샛길로 진입하게 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네의 커다란 나무를 보게 했다. 길을 잃게 했고 생각 속에 빠지게 했다. 수박을 먹었던 일이 진짜인지 아닌지. 수박은 어떻게 자라는지, 수박은 실재하는 건지, 수박이란 무엇인지.* 판판야의 단편 만화집 『게에게 홀려서』에는 무언가에 홀려서 그것을 따라가고 쫓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쫓아간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가 아니고, 그 따라감의 과정에서 주인공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 “눈을 의심할 만한 세부”(169쪽)라는 것에 있다. 「게에게 홀려서」에서 주인공은 그동안 지나갈 일이 없어 가본 적 없는 샛길을 오늘도 똑같이 그냥 지나치려고 한다. 그러던 주인공 앞에, 느닷없이 게가 한 마리 등장한다. “게다!”(7쪽)라는 외침과 함께 주인공은 게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계단을 내려가고, “난생처음 와보는 길”(8쪽)로 진입하고, ‘위험 돌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표지판 앞으로까지 걸음을 이어간다. 단지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이 목적인 여정이다. 그렇다면 도착지는 어디일까? 「게에서 홀려서」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어디로 통하는지 알게 뭐야!”(8쪽) 도착하는 것보다 선행되는 것은 언제나 나를 출발하게 하는 ‘무엇’에 대해 내가 가지는 호기심, 궁금증이다. 판판야의 만화집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매혹’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늘 ‘나’의 매혹됨에서 출발한다. 

  또 다른 단편 「파인애플을 모르신다」에서도 주인공은 파인애플을 쫓아간다. 정확히는, 파인애플의 생산자를 쫓아간다. 늘 통조림으로만 파인애플을 접해 온 주인공은 문득 파인애플의 실물을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파인애플이 어디서 어떻게 자라는 것인지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파인애플이 어떻게 나는지가 궁금해서 대도시로 이동하고,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을 찾아간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왜?’라는 물음이다. 「연못이 나타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방학 사이 학교에 생겨난 교정을 보고 놀란다. 연못의 출현은 주인공에게는 몹시 기이하고 궁금한 일이 되지만, 선생님도 친구들도 그 누구도 연못이 있든 말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갑자기 생겨난 연못은 “어느새 생겨나 있”(75쪽)는 것으로 치부될 뿐, 누가 어떻게 그것을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여름방학 자유 연구 발표 시간에 주인공은 내내 연못 생각에 잠겨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표로 알게 된다. 방학 내내 연못을 만든 주인공이 같은 반 친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학생들은 그 이야기에 모두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그런 것은 연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주인공은 생각한다. “난… 충분히 놀랐어.”(78쪽)

  갑자기 나타난 게와 연못, 출처를 알 수 없는 파인애플과 같은 사물들은 주인공을 ‘가던 길’로부터 이탈시켜 ‘샛길’로 빠지게 한다. 딴생각하지 않기, 샛길로 빠지지 않기, 같은 말들이 당부의 말로 쓰이는 현실에서 판판야는 우리에게 딴생각을 하라고, 샛길로 좀 빠지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것 같다. 일상의 모든 것은 들여다보는 순간에, 궁금해지는 순간에 이상하고 ‘불온’한 것이 된다. 「불온한 날」에서 주인공이 친구 집으로 가는 길, 길을 이루고 있는 ‘세부’들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다고 느끼듯이 말이다. “저 신호등, 다른 것들보다 좀 크지 않나?”, “뽑기 머신에 캡슐 채워 넣는 사람 처음 봤어.”, “개가 산책하고 있다.”, “바람도 전혀 안 부는데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건 왜지?”(166쪽) 같은 물음과 함께 친구의 집에 도착한 주인공은, 유독 오늘 재수가 좋지 않았다고 친구에게 말한다. 친구가 왜? 하고 묻자 곰곰 생각하다가, 그러고 보니 “딱히 나쁜 일은 없었”(168쪽)다고 답한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은 매번 일어나고 있다. ‘개가 산책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인공에 의해 목격되고 자각되고,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발화되면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뭔가 이상한 것’이 된다. 

  ‘뭔가 이상한 것’에 빠져서 딴 길로 새는 것. 생각을 따라가는 것. 쫓아가는 것. 우리에게는 생각에 잠길 시간이, 세부를 들여다볼 시간이, 찾아오는 딴생각을 내치지 않고 내버려둘 시간이 필요하다. 바람에 굴러가는 수박을, 나무와 충돌해 쪼개지는 수박을,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사람을 만들어 낼 시간이.

 


* 「파인애플을 모르신다」에 등장하는 “파인애플은 어떻게 나는지, 파인애플은 실재하는 건지, 파인애플이란 무엇인지”라는 대사를 변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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