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교보문고
△사진= 교보문고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를 펼치면 의문이 든다. 이론서인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등장인물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을 끝까지 읽고 역자 해제까지 살펴봐야 비로소 이 책이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라, 인류학자의 사유와 삶이 중첩된 에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제는 이 책에서 인류학이 더 이상 ‘먼 곳’에 있는 타자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님을 강조한다. 대신, 우리가 살고 있는 익숙한 공간들-플랫폼, 병원, 콜센터, 공항, 임시 체류소와 같은 ‘비장소(non-place)’-이 새로운 관찰의 장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접근을 통해 인류학이 단순히 대상만 바뀐 것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본다. 동료 학자들이 이를 ‘문학적 전환’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렇다면 왜 오제는 이토록 낯선 방식으로 글을 썼을까? 그는 말한다. “오늘날 인류학자는 자기가 관찰하는 사람들의 주관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속 개인의 달라진 지위를 반영해, 대표성의 조건을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오제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초근대성의 사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특징짓는 세 가지 과잉의 형상을 제시한다. 

 1. 사건의 과잉, 2. 공간의 과잉 3. 준거의 개인화

  정보와 사건은 넘쳐나고,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며, 기준은 철저히 개인화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하고, 동시에 아무것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이런 시대에 인류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오제는 말한다. “동시대 인류학의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대상이다.” 더는 ‘멀리 있는 타자’가 아닌, ‘같은 시간을 살아가되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인 동시대인’이 새로운 관찰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비장소’는 인류학의 새로운 실험실이 된다. 이런 변화는 학문 내부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루이 뒤몽은 “관심사가 바뀌었을 때 인류학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기존의 축적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다. 오제의 대답은 간결하다. “지식은 누적되지 않는다.” 연구란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내고, 기존 범주를 넘어서야 살아 있는 사유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단순한 진보주의가 아니다. 오제는 인류학이 처한 정당성의 위기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제 인류학은 단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학문이 아니라, 관계 맺기와 침묵 감지, 장소 읽기와 감각의 윤리를 수반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인류학은 점점 ‘미시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유사해진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점이 있다. 역사가가 과거의 문헌을 해석한다면, 인류학자는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가 하지 않은 말까지 함께 감지해야 한다.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배회하며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 ‘장소’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드 세르토는 “장소는 위치들의 즉각적인 지형”이라고 말한다. 장소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가 얽히는 구조다. 누구는 안으로 들어오고, 누구는 문턱에 머물며, 어떤 이는 애초에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채 부재로 남는다. 공간은 권력이고 배제이고, 사회 질서가 드러나는 기호다. 민족학자는 말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것들-침묵, 부재, 비형상화된 감정-까지 감지해야 한다. 이 감지는 단지 누락을 메우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층위에 다가가려는 윤리적 태도다. 우리가 직접 말을 듣는 사람들은, 종종 ‘말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관찰은 단순한 응시가 아니라, 누락을 감지하는 일이다.

  오제는 이러한 감각의 전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제안한다. 그는 말한다. “시간은 흐름이 아니라, 의미가 응축되는 순간으로 감각된다.” 광장 시장이 며칠 동안만 의미 있는 장소가 되듯이, 어떤 장소는 특정한 시간에만 ‘시간의 자격’을 얻는다. 우리는 공간의 구조를 통해 시간의 흔적을 감지한다. 사라진 풍경, 잊힌 출생지, 흐릿해진 장면들은 모두 단절을 통해 시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장치다. 그렇기에 오제에게 초근대성은 진실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진실의 부재가 전략이 되는 시대다. 탈근대의 아이러니와 놀이를 지나, 초근대는 통제와 최적화, 과잉 대응의 시대가 되었다. 그 안에서 인류학은 무너진 자리에 깃드는 새로운 삶의 감각을 감지하려 한다. 이제 인류학은 단지 타자를 기술하는 학문이 아니다. ‘나의 도유식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어느 장소에서 나를 새기게 되었는가?’와 같은 질문은 인류학의 질문이기도 하다. 타자가 아니라 입체적인 나, 분절된 지금, 격차의 삶이 새로운 관찰의 중심이 된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묻고 싶다. 어쩌면 ‘비장소’는 그 장소를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가? 너무 많은 것을 봐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끝끝내 내가 “관찰했다”고 자백할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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