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靜寂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가 함께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일이 발생한다 모든 버튼을 누르며 구조를 외친다뛴다 울거나 자조한다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의 시간이 흐른다낯선 서로를 마주보다가 눈을 피한다 엘리베이터에는 두 개의 거울이 마주하고 있다 주저앉은 이들은 비추지 않은 채 잘려나가는 질문과 조각나는 대답들 빛은 희미하다이들은 말없이 먼지 묻은 구석을 쳐다본다 그곳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해낼 듯이 이제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 습한 정적이 가득해지는데 손끝과 발끝이 저리다 숨이 막힌다바이러스, 혹은 무뎌지는 인간이라는 감각 이들은 점점
조화 상가 본 뜬 것을 함부로 집에 들이면 안 된다고같이 온 사람이 신신당부 한다 이건 꽃말이 뭐예요?여름 내내 피고 가을에 지는 거 있을까요 잎이 두껍고 너무 밝지 않은 것줄기가 탄탄하면서 유연한 것고급 원료를 입힌 것 가장 일정한 풍경을 고르는 방법이다혼자이고 싶다는 말은 혼자인 사람이 하는 말이다 마윤지 시인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등단 했다.시집 『개구리극장』 이 있다.
발견과 철회 아이에게 공룡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겁하네 어른에게 서류 가방이 있다는 사실보다 나을 게 없었네 대학 신입생에게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파라솔 말보로 둥근 잔디밭이 있다는 사실은 학생에게 교복이 있다는 사실보다 나을 게 없었네 딱 하나 나은 게 있었네 술만 먹으면 늘 취해 있던 아빠를 욕하던 그치만 군대도 안 가고 얼굴도 잘생긴 복 받은 놈 준호에게 네가 편집한 문집 거기 실린 내 글 진짜 잘 썼지? 이제는 이름조차 잊어버리곤 하는 눈매가 무섭고 다리는 길쭉해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체형 여름 방학 일기를 매일 쓰듯
주머니 속의 밤 이 깊이는 내가 만들었어요손을 넣으면 만져집니다 그게 꼭 안전하다는 건 아니지만 굴을 파듯이 벌레처럼 머리를 들이밀고먹어 치워야 생겨나는 틈으로 곧 배설물이 쌓이고 몸이 꽉 끼게 될 그 틈을 깊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만들었습니다 가져다 붙이고구입도 해봤고요 그건 누가 버리고 간 거지만 이 주머니 속에 깊은밤이 있다는 듯이 어젯밤의 인기 글은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본 적 있어?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댓글을 너무 많이 다는 바람에다 읽지도 못하고 삭제돼 버렸지만다들 실제로 어딘가에 누워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밤이 여기 있다
코끼리의 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그네를 타다가 뛰어내려 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 허공에서 발을 마구 구른다 고개를 들면 인사말이 내려와 어깨 위로 쌓인다 그네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면 공터의 용도가 달라진다 이제 반경 오십 미터에서 눈보라가 치지 않는다 나는 아직 허공에 있으므로 몸이 공기를 늦추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네의 줄을 놓쳤을 때 얕게 돋아나는 소름 놓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자애가 독백을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에 새학기가 시작돼 그러니까 다른 곳은 꼭 필요해 내게 익숙한 곳 변하지 않는 곳으로
나는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마포구의 붓카케우동 전문점 에서는 인원 수에 맞게 메뉴를 시킬 경우 면을 얼마든지 리필해준다 배가 불렀지만 세 번째 리필을 시켰고 결국 다 먹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자 집에 싸가서 간장을 뿌려 먹으면 끝까지 즐기고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 점원이 비닐봉지를 든 내 손목을 붙잡았고 나는 붙잡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안이 너무 더워서 밖에서 먹으려는 거예요, 그러자 점원, 문을 활짝 열어주며, 그럼 이 앞에서 드셔보시라고 좋지…… 그런데 마을버스 정거장 이름은 누가
아몰퍼스 도서관을 하나 상상한다. 이 도서관은 지금 내가 앉아있는 도서관 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믿지 않으면 도서관을 상상할 필요가 없지. 지금 내가 앉아있는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면. 내가 도서관을 상상하는 대신 도서관에 꽂혀있는 책을 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상상 속 도서관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앉아있던 도서관에 불 질렀다면. 방화범 되었다면.그럼 벌 받아야지.그래서 벌 받았다. 감옥에서.벌 받으면서, 상상 속 도서관에서 도서관 하나를 다시 상상했다.*시간이 흐르고 감옥에서 석방된 뒤,나는 도서관에 불
* 222호 의 오류를 바로 잡습니다.8면 차현준 시인의 의 첫 문장 ‘공원에서’는 조판 과정 중 발생된 오류입니다.현재 웹 신문에 게재된 작품은 수정을 완료했으나, 종이 신문의 경우 수정되지 못한 상태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오류에 대해 차현준 시인께 사과드립니다.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면밀히 살피는 동국대학원신문이 되겠습니다.
주말부터 나는 그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끄러웠던 집 주변을 떠나 굳이 굳이 지하철을 타고 그 동네까지 찾아갔습니다 교통비 아깝게 뭐 하러 거기까지 가냐는 귀지는 그 건물에 들어가서 다 떨쳐냈습니다 해야할 일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가만히 쉴 때는 덕담이나 해주시던데요…… 내가 받을 액수를 누가 살펴본다면 덕담이란 걸 건넬까, 싶었지만 급여와 감내 간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키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무언갈 감내해내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고 플립플롭을 신고 느리게 걷는 동네 사람들은 평일에도 화목해 보였
공원으로의 복원 공원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자갈돌을 차례로 걷어낸다 누군가는 이 작업이 복원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의 회복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원래대로 돌려놓는 일을 기쁘게 여기라고도 했다 모든 속셈은 밤으로 향하고 트랙을 돌던 이는 경로를 이탈한다 공원에는 토끼 한 마리 다람쥐 한 마리 한 쌍이 아닌 한 마리씩 살았고 죽으면 새로운 한 마리가 복원되었다 공원의 방명록은 양측마비의 시간을 붙잡고 밤마다 짖는 개의 울음을 기록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잃었지만 세 명의 사람이 와서 땅을 파고 묘목을 심고 다시 땅을 다졌다
프롬 퀘이사 남의 무덤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 있니. 조심스레 노크해 보면 우아하게 똑똑, 대답해줄 것만 같은 무덤들. 언젠가 나무 사이를 헤매다 모르는 당신의 무덤 위에 드러누운 적 있어. 풀 가까이 귀를 대면 작게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지. 내 심장 원하지 않을까? 차가운 뼈 불쑥 튀어나와 손 틈 사이 깍지를 끼워주지 않을까? 최초로, 최초로 말이야. 이미 뿌리를 타고 올라가 삼만 팔천 번째 이파리가 되었을지 모를 당신에게 머리를 가만히 맡기고 싶었어, 외로웠어. 너 우리의 혼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우리가 다리를 벌리면 딱 그만큼
한낮의 연극 오와 열을 맞춰 서서 유리창 너머를 응시한다 장의사들이 있었다 극막을 올리기 전 무대장비를 고치러 온 스태프들 같았다 희고 얇은 천이 솟으면 죽음이 뒤로 가려지고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천 바깥으로 드러난 발가락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공연 준비 같으면서 취조실에 여러 명의 용의자들과 서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천장이 너무 하얗고 뜨거워서 성가대가 되어서 노래나 부르고 싶기도 했다 천이 펄럭이고 무대 뒤에서 꽃다발을 엮는다 두세 번의 헛기침 침묵의 공회전 나는 분명 신실한 관람객은 아니다 다리가 저려오고 있었다 저쪽에
자유가 있는 숲길 안개 가득한 숲길에서 보았어요. 숲으로 갈수록 박자는 빨라져요 가자. 가자. 외치는 숲길. 신발을 거꾸로 신고 숲길을 뛰어다녔어요. 딛으면 딛을수록 꺼지는 땅에 서 있어요. 꺼지는 땅을 밟고 서있어요. 여기서부터 나의 땅이에요. 꺼지는 땅에 서 있는 기분을 아세요. 꺼지는 땅에 서 있어도 밟을 곳이 있다는 마음. 그걸 안심하는 마음이라고 불러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서 있어요. 지겨워도 꾹 참고 잘 왔어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여기까지 왔을 때. 이끼가 드문드문 있고 깊어갈수록 침엽수가 많아지는
어쩐지 빨갛고 아득하더라니.미나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문고리를 돌리면서 둥근 것을 손에 쥐는 감촉에 대해생각하느라 잠시 잊었지만. 집이 아니면 화장실에 갈 수 없다던 여자애가 종례 시간에 결국 주저앉을 때그때도 나는 미나를 생각했는데.둘둘 말린 이불 속에서 미나가 울고 있었다. 큰 소리를 내며 망가져 버리는 풍선처럼,저러다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신발을 벗는 것도 잊고 나는 미나를 달래야겠다. 서두르는데, 서두르다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서두르는 것에 실패한 채로방문 너머에서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새로 산 게임 속에서, 그는
왜 어릴 적 영상이 여기 남아 있는 걸까. 노이즈가 많습니다. 찢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화면은 흐리고, 어린 나는 뒷목이 희고 모자를 썼습니다. 피아노 학원은 비디오 가게를 지나면 나옵니다. 골목에 떨어지는 빛을 따라 걷습니다. 나는 피아노를 배웁니다. 여섯 살 때부터 배웠습니다. 개가 짖습니다. 오선지가 찢어집니다. 학원에는 방이 여러 개 있습니다. 쇼팽 방, 모차르트 방, 드뷔시 방…… 방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방은 선생님이 정해줍니다. 오늘은 쇼팽 방이 비었습니다. 나는 드뷔시 방을, 왼손 아래 고장 난 건반들을 좋아합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프론트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을 찾아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한다 혹시 지혜를 찾느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양 옆으로 정장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시간이 까맣게 흘러가고 저 사람이에요 프론트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지혜가 내 앞에 멈춰선다 모자를 벗자 그 안에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제가 너무 늦었지요 지혜는 멋쩍게 웃고 반짝이는 생각 속
무슨 얘길 했더라 우리하려던 게 뭐였지?세상이 우릴 집어삼키더라도 아마네가 슬퍼할 때그것에 공감하고 싶었지만부족한 거 같아 나는크리스마스이브였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할수록 안 좋은 사람이 되었다감당할 수 없는 일이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많아서모두우스꽝스럽고*청년이고 중소기업에 다니고일 년 소득이 기준치보다 낮고 이자는꼬박꼬박 낼 수 있다 증명하기 위해연차 휴가 두 번 내고 서너 번점심 거르고 은행에 갔었다돌려받을 보증금, 사회생활 시작하고 모은 돈 얼마, 아버지에게 빌린 오백만 원, 어머님께서 마이너스 통장에서 꺼내준 이백사십만 원
혼밥으로참치찌개를 먹다가바다 생각이났다파도에 단련된 물고기들이분주하게입구를 오가고 있었다더러는 그물에 걸리고굵은 낚시 바늘에입술이 뚫렸지만계속해서 헤엄치고 있었다하나 둘 입말을 잊어버리고통조림에 담길 상처와그 적막의 배후까지잊어버린 채바다로 바다로내면의 소용돌이를 풀어내고 있었다겸상을 허락하지 않는바다의 식탁에정신만 남은 물고기들이 찾아온다빈자리마다 비린내자욱한 분식집에서아무렇지도 않게 계산을 마칠 때어떤 허기는찌개 속 살점을 덜어주고서야 잔잔한등짝을 드러낸다당황스러운 이 고백마저도다 같은 어족(魚族)이었음을 눈짓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으로 우리의 마지막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함께하는 것 너는 나에게 동화를 듣다가 잠에 빠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들면 동화가 꿈으로 펼쳐지고 죽은 영혼은 꿈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너의 곁에서 네가 잠들어 있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을 할 거야. 그다음 너에게 동화를 들려줄게.”
나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 지금껏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절벽에 서서 바다를 보기로 결심한 사람 그리하여산으로 빠지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 지나친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 겁쟁이로 살다가 겁쟁이로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평생 다른 겁쟁이들을 증오한 사람으로서 바다를 바라본다가령 여기까지 오는 길 지갑을 주웠는데 정말 아무도 없었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착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으로서 여기까지 도달한 수고와 노력이 아까워 계속 가보기로 결정한 사람으로서바다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안 돼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