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이 물든 정각원 풍경 (사진=오솔미 편집위원)
△ 단풍이 물든 정각원 풍경 (사진=오솔미 편집위원)

  올해도 법학관과 혜화관을 잇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정각원 앞 단풍이 붉게 물든 것을 본다. 학기의 바쁜 흐름 속에서도, 그 잎의 변화는 계절이 아니라 ‘시간의 무상(無常)’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 정각원의 고요한 기와와 붉은 단풍이 어우러진 풍경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고요하지만, 사실은 찰나의 변화를 품고 있다. 한순간 바람이 스치면, 그 화려한 색채는 속절없이 흩날린다. 사람들은 단풍을 보고 절정이라고 말하지만, 그 절정은 곧 쇠락의 시작이기도 하다. 정각원과 전국 사찰의 단풍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 짧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분자 단위로 설명한다. 여름 동안 잎이 초록색을 띠는 이유는, 광합성을 담당하는 녹색 색소인 클로로필(Chlorophyll)이 잎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이 되어 햇빛이 줄고 기온이 낮아지면, 나무는 생존을 위해 잎의 영양분을 줄기로 되돌려보내며 클로로필을 분해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녹색 아래 숨어 있던 색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란빛의 카로티노이드, 붉은빛의 안토시아닌이 바로 그것이다. 즉, 단풍은 ‘무언가를 새로 얻어서’ 붉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것을 버림으로써, 원래 존재하던 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단순한 생리학적 변화는,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과 놀라우리만큼 닮아 있다. 불교에서 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깨달음이지만, 그 변화의 의미는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변화는 곧 존재의 본질이며, 사라짐은 곧 또 다른 생성을 낳는다. 나무가 잎을 버림으로써 에너지를 보존하고 다음 해의 생을 준비하듯, 모든 존재는 ‘잃음’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얻는다. 단풍잎의 붉음은, 어쩌면 사라짐이 만들어낸 가장 찬란한 순간일지 모른다.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행(行)은 변한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행’은 움직임, 곧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작용을 뜻한다. 단풍잎의 색이 변하는 것 또한 제행무상의 한 장면이다. 과학적으로는 색소의 분해와 합성이라는 화학 변화이지만, 그 안에는 ‘존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잎은 스스로의 생을 다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자신을 비워낸다. 그 비움의 과정이 인간에게는 붉은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것이다.

  단풍의 색은 또 다른 과학적 조건, 즉 빛과 온도의 인연에 따라 달라진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수록, 잎 속의 당분이 축적되어 안토시아닌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 또한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클수록 색은 더 선명해진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우면 색소는 파괴된다. 이때의 적정한 ‘온도 차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를 떠올리게 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만 진정한 아름다움이 피어난다는 뜻이다. 자연의 색이 그러하듯, 인간의 삶 또한 지나친 집착이나 무관심이 아닌 ‘중간의 온도’에서 가장 빛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단풍의 색깔이 잎마다 다른 이유가 각 잎이 받은 햇빛의 양과 방향, 그리고 그 나무가 뿌리내린 토양의 성분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같은 나무라도 가지의 위치나 바람의 세기에 따라 붉음의 농도가 달라진다. 이는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도 맞닿는다.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한 잎의 붉음은 우연이 아니라, 햇빛·공기·기온·시간이 함께 빚어낸 인연의 결과다. 그러니 단풍 한 장을 본다는 것은, 사실상 우주의 관계망을 보는 일이다.

  잎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과학은 여전히 그 안의 질서를 설명한다. 줄기와 잎 사이에는 ‘이탈층(abscission layer)’이라 불리는 세포층이 형성되어, 잎이 고통 없이 떨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끊는 것이다. 이 또한 불교의 무아(無我)와 통한다. 잎은 자신을 나무와 구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떨어져야 나무가 산다는 사실을 안다.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자기 보존이 아니라, 관계의 유지다. 단풍잎의 낙하에는 그러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정각원 주변 그리고 우리대학의 가을길을 걷다 보면, 붉은 잎 아래에서 묘한 평화를 느낀다. 수많은 색의 층위가 공기를 물들이고, 바람이 그것을 흩날리며 잠시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코 정지된 것이 아니다. 잎은 떨어져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나무의 뿌리를 살린다. 단풍의 끝은 곧 봄의 시작이다. 무상(無常)은 끝을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이어짐’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종종 ‘드러남’이라고 표현한다. 수행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으나 가려져 있던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일이다. 단풍이 붉어지는 이유 또한 그와 같다. 잎이 스스로의 초록을 거두고 나면, 그 속에 본래 있었던 색이 세상에 드러난다. 단풍은 우리에게 말한다. “잃는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대학의 가을은 그렇게 과학과 불교의 언어가 조용히 만나는 계절이다. 분자와 색소의 변화로 읽어도, 존재의 무상으로 읽어도, 단풍은 한결같이 ‘변화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 잎이 모두 떨어진 뒤에도, 나무는 봄을 준비한다. 나무가 자신을 비우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비워야 할까.

  붉음이 가장 깊은 순간, 단풍은 이미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야말로 또다른 이어짐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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