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발견, 건축을 향한 철학적 질문

  얼마 전,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의 사상 중 특히 ‘파라노이아(Paranoia)’와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트리(Tree)’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건축의 모습에 절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단단하고 견고하며 예측 가능한 ‘나무’ 같은 세상을 추구하는 ‘파라노이아’적 경향, 그리고 중심 없이 유동적으로 뻗어 나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땅속줄기’ 같은 ‘리좀’을 닮은 ‘스키조프레니아’적 속성.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과연 오늘날 우리의 건축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건축과 바이오필릭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가로서, 이 질문은 곧 내가 마주한 고민의 핵심이 되었다.

△그림=김성훈 (주)지음플러스 대표 건축가,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그림=김성훈 (주)지음플러스 대표 건축가,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고정된 ‘나무’ 건축의 한계: 아이덴티티에 갇힌 도시

  현재 우리 도시의 수많은 근린생활시설과 상업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굳건히 서 있다. 한 번 지어지면 그 목적과 기능을 바꾸기 어려우며, 견고한 정체성에 강하게 고착된 양상을 보인다. 효율성과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획일적인 형태로 지어지는 이러한 건물들은 ‘파라노이아’적 사고가 건축 공간에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된 ‘나무’형 건축은 시대의 급변 속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오늘날, 단일 기능에 고정된 건축물은 용도 변경의 유연성이 부족하다. 이는 자칫 도시의 유기적인 변화에 걸림돌이 되어 공동체의 활력을 저해하고, 지역 간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건물이 가진 물리적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그 유연성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도시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는 한다.

 

‘땅속줄기’ 같은 팝업스토어, 그 이면에 숨겨진 문제들

  이러한 고정성에 대한 반작용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는 ‘리좀’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팝업스토어’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단 몇 주, 혹은 몇 달 만에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스키조프레니아’적 속성으로, 고정된 중심 없이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나타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공간은 유연하게 변모하며, 방문객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하고,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며 물리적 형태를 넘어선 이야깃거리를 생산한다. 이러한 특성은 분명 고정된 ‘나무’ 건축의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땅속줄기’처럼 자유로운 팝업스토어에도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바로 지속가능성의 문제이다. 일시적 운영을 위해 빠르게 설치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폐기물은 환경 오염의 심각한 원인이 된다. 값싼 패널이나 플라스틱, 가벽 등 단기적 사용만을 고려한 건축 자재의 사용은 일회성 소비 문화를 부추기며 환경 부담을 가중시킨다. 짧은 수명 주기와 끊임없는 재건축·해체 과정은 결코 지속가능하다고 볼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준다. 스키조프레니아적 유동성은 가졌지만,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땅속줄기’를 향하여: 다음 과제를 던지다

  결국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한다. 너무나 고착되어 변화에 둔감한 ‘파라노이아적 트리’ 구조의 건축도, 환경적 부담이 큰 ‘스키조프레니아적 리좀’ 방식의 팝업스토어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다. 우리는 공간의 유연함과 확장성을 ‘리좀’에서 배우되, 그 속에 진정한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심을 것인가.

  변화에 열려있으면서도 자원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생명을 불어넣으며, 나아가 공동체의 활력을 증진시키는 ‘지속가능한 리좀’의 건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재료의 순환, 모듈형 설계, 바이오필릭 디자인 등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흔들림 속에서 지속가능성을 찾다: ‘땅속줄기’ 건축을 위한 네 가지 열쇠

‘일회성’ 팝업, 그 이상의 가치를 묻다

  앞에서, 나는 질 들뢰즈의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 그리고 ‘트리’와 ‘리좀’이라는 흥미로운 철학적 개념을 통해 오늘날 건축의 두 얼굴을 조명해 보았다. 고정되고 견고한 ‘나무’ 같은 건축이 가진 한계, 그리고 변화에 유연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뻗어나가는 ‘땅속줄기’ 같은 팝업스토어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스키조프레니아적 리좀’ 방식의 팝업스토어가 남기는 대량의 폐기물과 자원 낭비, 즉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에 대한 고민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이 유연하고 창의적인 ‘땅속줄기’ 건축에 어떻게 지속가능성이라는 씨앗을 심을 수 있을까? 오늘, 나는 지속가능한 건축가로서 ‘리좀’의 생명력을 가지면서도 지구와 공존하는 미래의 팝업스토어, 더 나아가 모든 유연한 건축을 위한 네 가지 핵심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공공에게 열린 공간: 공유와 소통을 위한 ‘열린 문'

  오늘날의 상업 공간은 소비자에게 제품을 ‘파는’ 기능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리좀’형 건축은 단순히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팝업스토어가 일시적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기간만큼은 공공에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며 도시의 활력을 높여야 한다.

  특정 브랜드의 홍보 공간을 넘어, 지역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휴식하거나 교류할 수 있는 오픈된 라운지, 작은 강연이나 워크숍을 열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혹은 젊은 예술가나 사회적 기업에게 전시나 판매 기회를 제공하며 상생의 장을 마련할 수도 있다. 건물의 벽을 투명하게 만들거나, 개방형 파사드를 통해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허물어 시민들이 공간의 존재를 인지하고 부담 없이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리좀’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입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의 자발적인 활동을 촉진하는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구현한다.

△ 도시를 향해 개방형 “빈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와 공간의 연결 문의 역할을 한다. (사진=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 도시를 향해 개방형 “빈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와 공간의 연결 문의 역할을 한다. (사진=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2. 유연한 공간 변화가 가능한 레이아웃 구조: 해체를 넘어 ‘순환’을 향한 디자인

  가장 중요한 문제, 즉 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건축의 구조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리좀’의 유동성은 가져가되, ‘일회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쉽게 해체하고 재활용, 재사용, 혹은 다른 용도로 전환될 수 있는 건축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보-기둥 구조’처럼 공간의 구획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내부 벽이나 가구를 쉽게 설치하고 해체할 수 있는 모듈형 디자인을 적용하여, 팝업이 끝난 후에도 자재의 대부분을 온전히 회수하여 다음 프로젝트에 재사용하거나, 다른 건축물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표준화된 연결 방식을 사용하여 설치와 해체가 용이하며, 필요한 최소한의 재료만을 사용하되 그 재료들의 재활용률을 극대화한다. 이는 단발적인 ‘파괴’를 넘어 ‘순환’으로 이어지는 건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리좀’이 땅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듯 건축 또한 자원의 순환적 흐름 속에서 지속되도록 만든다.

3. 바이오필릭 디자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자연의 연결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다. 바로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 사랑의 본능이다. 팝업스토어처럼 짧은 기간 운영되는 공간일수록, 갇혀 있는 도시 속에서 잠시나마 자연을 느끼게 하는 바이오필릭 디자인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단순히 화분 몇 개를 놓는 것을 넘어, 공간 자체를 하나의 작은 생태계처럼 디자인하는 것이다. 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설계하고, 재사용 가능한 살아있는 식물들을 벽면이나 천장에 과감하게 배치하는 방법이다. 자연 채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력 소모를 줄이고, 실내 공기 질을 개선하며, 방문객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과 활력을 선사한다. 사용된 식물들은 팝업 기간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심거나 재활용하여 생명의 순환을 돕는다. 이러한 바이오필릭 디자인은 차갑고 일회적인 공간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리좀’처럼 유연하게 자연과 도시를 연결하는 접점이 된다.

△ 바이오필릭다지인이 공간에 적용된 사례_지음플러스 설계 (사진=카페포카오)
△ 바이오필릭다지인이 공간에 적용된 사례_지음플러스 설계 (사진=카페포카오)

4. 도시 속 오아시스: 도시의 유기적 네트워크를 잇는 ‘마디’

  기존의 팝업스토어가 도시의 공허한 공간에 홀로 ‘툭’ 던져지는 단발적인 존재였다면, 이제는 도시의 ‘결절점’ 그리고 오아시스 역할을 해야 한다. 정원도시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도시 형태를 추구하며, ‘결절점’은 그 안에서 중요한 기능과 동선이 교차하는 핵심 지점을 의미한다.

  새로운 팝업스토어는 무작위적인 장소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활력을 불어넣고 기존 인프라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의 결절점, 공원과 상업 시설이 만나는 지점, 혹은 역사적 맥락이 있는 동네의 빈 공간 등에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는 불필요한 이동을 줄여 탄소 배출량을 감소시키고, 지역 경제와 상생하며, 팝업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커뮤니티의 일시적인 허브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접근은 ‘리좀'이 한없이 뻗어나가면서도 필요한 지점에서 새로운 ‘마디’를 만들어 네트워크를 강화하듯, 도시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 정원도시로의 결절점 (사진=아모레 성수)
△ 정원도시로의 결절점 (사진=아모레 성수)
△ 정원도시로의 결절점 (사진=아모레 성수)
△ 정원도시로의 결절점 (사진=아모레 성수)

‘지속가능한 리좀’의 미래를 그리며

  ‘스키조프레니아적 리좀’의 유연하고 변화무쌍한 특성은 오늘날 건축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더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래 건축이 탄생할 수 있다. 공공에게 열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유연한 구조로 해체를 넘어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바이오필릭 디자인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정원도시의 결절점이 되어 도시의 유기적 흐름에 통합되는 것.

  이러한 시도들이야말로 ‘일회성’이라는 오명에 갇히지 않고, 환경과 사람, 그리고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지속가능한 땅속줄기’ 건축의 모습을 구현하는 길이다. 건축가로서 나는 이러한 비전이 우리의 도시를 더 건강하고,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도시를 위해, 다음 시대의 건축은 반드시 이러한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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