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영화제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자신이 터미널을 잘못 예약했다는 걸 버스 출발 2분 전 깨닫는다. 다행히 남아있는 버스표가 있지만 일곱시간 뒤다. □□는 그렇게 일곱시간 동안 버스 터미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사진= 신하연 편집위원
△사진= 신하연 편집위원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한편의 로드무비 같은 출발이었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전주국제영화제는 로드무비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제의 완성은 상영관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전주 영화의 거리, 가맥 거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전주로의 길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전주국제영화제로 향하는 나의 유랑기가 다만 내 개인적인 일기가 아닌, 여럿에게 전주로 이끄는 또 다른 매력이 되길 바란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편의점에서 간식도 산 뒤 게이트 앞으로 갔다. 내 버스 시간과 일치하는 버스가 없는 걸 알고도 의아함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어코 안내원 선생님께 여쭤본 뒤 내가 엉뚱한 터미널에 와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전광판에 쓰인 일방적인 숫자로는 내가 잘못 예매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나 보다. 사람의 입에서 한번 더 확인을 받고 나서야 내 착오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AI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는 요즘, 신기술에 어둡지 않은 나도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발견 혹은 인정한 순간이 바로 티켓에 찍힌 버스 출발 2분 전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밥을 먹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는 시간에 지하철로 두 정거장만 더 갔으면 되었을 일을…

  터미널을 잘못 예약한 바보 같은 사람과는 다르게 그 대처는 놀랍도록 이성적이고 순발력있었다. 재빠르게 정시가 되기 전 표를 취소하고 수수료만 낸 채로 티켓값을 환불받았다. 동시에 현장 매표소에 줄을 서 가장 빠른 전주행 티켓을 여쭤봤다. 앞에 줄서 계셨던 어르신 네다섯분이 모두 오늘 남은 표가 없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돌리셔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수가지 불안이 스쳐갔다. 전주에 못 가면 어쩌지? 예매한 영화는 양도해야하나? 만나기로 한 친구는? … 다행히 누군가 취소한 것으로 예상되는 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그렇게 전주 앞에 서울에서의 일곱시간이 놓이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나의 빈 시간을 채우러 △△가 와 함께 해주었다. 우리는 터미널 앞 한강으로 향했고, 걸어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 단지들을 보며 미래의 내 집이 될 아파트 관상이라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완연한 봄기운 덕에 한강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순간 내가 전주행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뒤로 한 채, 돗자리를 살까 하는 유혹에 빠졌지만 한강라면을 먹고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어쩌면 몇 년간은 전주를 갈 때마다, 이 날의 한강과 한강 라면, 자전거 그리고 함께해준 △△를 더 기억하지 않을까. 다만 나에겐 돌이켜보면 당황스러워도 추억이 될 수 있는 뜬 시간이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소외되어 현장 예매의 선택권 밖에 없는 이들에겐 반복되는 지루함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일곱시간의 유랑을 끝내고 정작 버스에 오른 뒤엔 베테랑 기사님을 만난 덕분에 연휴의 시작 날임에도 도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서 나온 지 12시간만에 멀고도 가까운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에 도착한 이후의 일들은 매년 같은 영화의 반복재생처럼 흘러간다. 식도락 영화제를 하려고 했으나 영화 보기 바빠 저녁 한 끼만 먹은 이야기. 더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들과 가맥집에서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느라 다음 날 점심밥을 포기한 채 영화 보러 가는 이야기. 편안한 침대를 가진 숙소가 있음에도 굳이 심야영화를 보며 영화관에서 밤새우는 이야기. 여기에 올해의 다른 변주는 친구 숙소에 자리가 비어 원래 돌아가려던 날에서 하룻밤을 더 자고 간 이야기.

  계획쟁이인 내가 영화제에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내 계획이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거대한 빈 시간이 생겨도, 영화제에서 영화를 못 봐도, 불편하게 밤을 지새워도, 이 사람들은 매 순간을 낭비가 아닌 낭만으로 만들어준다. 지금 내 곁의 사람들은 낭비가 낭만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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