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쓰기를 주저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의 글이 세상에 영원히,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까지도. 나의 글은 나보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나를 평가하는 꼬리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글 쓰는 일이 종종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렸을 때까지 글쓰기는 분명 행복하기만 한 일이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겪은 기상천외한 사건, 번뜩 뇌리를 스친 독특한 아이디어,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소고, 일상의 감각들을. 한 줄 두 둘 주욱 적어 가다 보면, 그게 금방 노트 한 권을 채울 때가 많았다. 분분히 날리는 생각들을 종이에 거둬들이는 작업이 즐거웠고, 사각사각 닳아가는 연필심의 무게만큼 가벼워지는 나의 마음을 느끼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 나의 노트는 비록 완벽하지 않은 문장이나 분절된 단어로 가득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생각을 아주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멋진 공간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의 글은 과거에 비해 선명하지 않은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아 울적해진다. 커가면서 분명 점점 더 많은 글을 접하고 다양한 글을 쓰는 방법을 연습했는데 오히려 내가 쓸 줄 아는 글의 종류는 줄어들게 된 것만 같다. 특히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글은 ‘전공 분야의 학술적 글쓰기’로 한정되었고, 가뜩이나 궁한 글을 이리저리 규격에 맞춰 재단하다 보니 부실한 글을 남기는 일이 잦아졌다.

 ‘문장이 왜 이리 길지? 적절한 곳에서 끊어야 하는데. 여기에 이 말이 진짜 필요한 거야? 그냥 빼자. 왜 자꾸 비슷한 단어를 반복해서 쓰는거야? 참신한 단어는 없어? 지금은 맞다고 생각하는 게 10년, 아니 100년 뒤에는 유효하지 않은 개념이면 어떻게 해!’ 이렇게 영원히 남겨져 평가받을 글을 상상하다보니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문장만을 남기거나, 심지어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남은 글을 우두커니 바라보자니 나의 글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 글은 때론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는 비겁한 문장으로 읽혔고, 제 의지가 담기지 않는 글을 쓴다는 무력감은 결국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게 했다.

 어렸을 때까지 마냥 즐겁기만 했던 글쓰기를 점점 무겁게 받아들인 것은 ‘글을 쓰는 책임감’을 인식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니 새로운 발굴이나 과학적 분석의 결과로 과거 학설이 다시 쓰이는 일을 직접 목격했고, 누군가 잘못 단 각주를 지속해서 재인용하는 일이 학계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딘가에남겨질 글을 쓴다는 행위의 무게를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나의 글이 잘못된 정보를 전하지는 않는지, 모두에게 잘 읽히는지’를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완벽한 글만 써야한다’는 무게에 짓눌려 글 쓰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게 됐다.

 다시 나의 글을 쓸 용기를 얻기 위해 ‘나는 왜 글을 좋아하는지’를 돌아본다. 과거의 나는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질 것들을 누군가는 기억할 수 있게 기록하는 일을 좋아했다. 지금의 내가 사랑하고, 앞으로 써가고 싶은 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나의 글을 통해 ‘2024년에는 이런 학설도 존재했구나. 그럼 나는 이렇게 생각해봐야지!’하고 덜 방황하게 도울 수 있는 글. 이정도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더 나은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두려움은 성장통으로 감내해야만 할 것 같다.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보다, 불완전한 글이라도 계속해서 써나가는 게 훨씬 더 ‘미희’스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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