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Pixabay
△ 사진= Pixabay

  인공지능은 더이상 예술에서 소재로만 쓰이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며, 음악을 작곡한다. 예술이라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뺏긴 우리는 21세기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심혜련의 논문 「인공지능 예술의 수용문제」는 인공지능을 대하는이러한 적대시 태도가 과연 바람직한지 반론을 제기한다.

  인간에게 기술은 ‘제2의 자연’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공기와도 같다. 우리의 지각 체험을 생각해보자. 기술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지각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이 등장해 예술과 결합했을때, 우리의 예술 수용은 어떻게 변화할까. 이러한 기계-예술의 수용문제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사진의 등장은 시각적 이미지의 재현 과정에서 인간의 손이 해방되었음을 알렸다. 기계-눈인 카메라는 기술적으로 탈주체화된 눈으로, 자연적인 지각과 비교되었다. 발터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개념은 이 같은 ‘기술에 의해 확장된 시각’을 설명한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기술의 도움으로 시각세계에 등장했으며, 기계 눈은 인간 시각의 맹점까지 더 정확히 포착한다. 그러나 이 같은 포착과정은 다분히 파편적이므로, 여기서 예술가는 이미지를 관찰, 선별, 의미부여하는 재구성 행위를하게 된다.

  과연 사진은 기계 작동의 산물일까 혹은 사진사의 적극적 행위로 인한 예술적 산물일까. 벤야민은 이러한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비판하며, 예술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진으로서의 예술을 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의 등장으로 이미지 자체에 접근성이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예술계에 혁명적인 지각의 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예술 여부에 대한 논쟁이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태도의 연장이다. 예술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새롭게 등장한 예술이 예술가와 수용자에게 어떤 영향을주는지 관계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창작하는 듯 보이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가일까. 예술의 정의와 본질을 사유해보지만, 이러한 논의에서 인공지능시대라는 우리의 사회적, 기술적 상황은 배제된다. 모더니즘 이후 현대예술에서 예술가는 ‘천재’가 아닌 협력하는 ‘기획자’에 가깝다. 창의성, 창조성 대신 디자인 환경과 프로그램이 더 중요해진 시대이다. 작품은 창조하는 것이 아닌, 실행하는 것이 되었다. 새롭게 부여된 예술가의 역할은 작품이 실행되도록 적절한 제시어를 제공하고, 특정 이미지를 선별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이다. 선택과 의미부여는 가치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인공지능에겐 아직 이 가치판단 능력이 부재하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단순 도구 이상이지만 예술가는 못되며 예술가의 협력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인간의 구분짓기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기록하는 인공지능은 무의식의 세계가 없다. 또 모든 기억을 기술적 장치에 기록해 외재화하려는 인간은 그런 인공지능과 닮아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작품을 수용하기 위해 수용자의 태도 또한 변화해왔다. 과거 이미지 수용자들은 관조와 몰입을 중심으로 했지만, 디지털이미지의 등장으로 수용자들은 편하게 이미지를 수용하게 되었다. 인공지능 예술 시대에는 수용자들이 이를 넘어 스스로 장치를 실행하는 예술가가 될 것이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흐려지고, 인공지능 예술 역시 예술 여부를 두고 가타부타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즉, 예술가도 수용자도 인공지능과의 공진화를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태도가 기반이 되어야 기술의 불쾌한 수용 역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