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죠스’ (1975)를 중심으로
과연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제대로 잘 알고 있을까. 또 우리 밖의 존재는 어떻게 우리와 다르고, 어떻게 우리와 같을까. 과연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테두리는 어디까지 일까. 우리와 우리 밖을 가르는 선은 어디서 정해지는 걸까.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기지의 대상이면 우리이고, 우리가 잘 모르는 미지의 대상이면 타자가 되는 것일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전기영화 <파벨만스>(2022)를 보면, 어린 새미가 영화라는 매체에 매료되는 첫 순간이 그려진다. 열차가 마치 스크린을 뚫고 관객과 충돌하는 듯한 이미지는 어린 새미가 영화에서 느낀 첫 압도감이다. 그 정의 내리기 힘든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새미는 집에 돌아와 열차 추돌 장면을 무수히 여러 번 반복해 찍는다. 어쩌면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자신의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그 순간을 재현하고 또 재현하며 행위의 주도권을 갖는 시간들의 합은 아닐까. 그리고 단순히 우리와 다른 미지의 대상이어서 공포로만 다가오던 것들이 가만히 보면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영화 아닐까.
스필버그의 초기 세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미지의 존재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죠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어를 다루는 듯하지만, 이 기지의 존재를 예외적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을 영화 초반에 배치한다. 턱의 크기가 이례적으로 크고 식인기계라고 불리며, 우리가 기존에 알던 존재와는 다름을 강조한다. 이에 더해 그 외형의 등장은 뒤로 유예시켜 영화가 시작하고 2/3 지점이 되어서야 관객 앞에 비로소 보이며, 관객에게 이 상어는 미지의 존재나 다름 없어진다. 스필버그의 바로 뒤이은 작품인 <미지와의 조우>(1977)는 <죠스>에서의 이러한 설정을 더욱 극대화한다. 기지의 동물 상어를 미지화시켰던 작업을 대체하여, 아예 지구 외 생명체와의 소통 과정을 그린다. 이들의 등장은 한층 더 지연되어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이 되어서야 잠깐 얼굴을 비추는 꼴이다. <죠스>와 <미지와의 조우> 두 편의 영화는 제목처럼 상어, 외계인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정작 관객이 화면에서 보는 것은 이들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 인간의 감정 같은 것들이다. 즉, 외부의 것이 불러온 내부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이다. 반면 <E.T.>(1982)에서는 우리가 미지라고 생각했던 외계인이 기지의 대상으로 재현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자신의 종족에서 낙오된 E.T.를 배치해 그 등장을 전면화한다. 이 작품에서 타자로 느껴지는 것은 되려 소년과 E.T.의 우정을 방해하는 인간 어른들이다.
세 작품의 흐름으로 볼 때, 우리가 타자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생각보다 우리와 닮았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라고 생각했던 모습은 얼마나 우리와 닮지 않았으며 이질적인지가 폭로되는 과정이다.
<미지와의 조우>와 <E.T.>에선 외계생명체와 인간 간의 소통 과정을 우호적으로 그리기에, 둘의 동질성, 유사성은 전면에서 느껴진다. (<미지와의 조우>에선 음(음악)으로 소통을 이루고, <E.T.>에선 인간소년과 신체가 동기화되는 방식으로 소통하게 된다.)
반면 영화 <죠스>의 표면은 아미티 지역의 인간들 대 죠스라는 상어의 이분법적 대결로 보인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여러 장치들을 설정해 영화가 단순히 인간 대 상어라는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보이게끔 만든다.
첫째는 영화의 전후반부가 비교적 명확히 나뉘어 있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육지 위에서 후반부는 바다 위에서 진행된다. 영화가 죠스와 인간의 식상한 이분법 대결에 불과했다면, 육지 위의 인간들은 연대를 보여줬을 것이다. 그러나 장소를 떠나 영화 내내 관객이 시종일관 보는 것은 브로디 서장의 고군분투다. 즉 영화는 브로디 서장이 육지 위에선 지역 주민들과 바다 위에선 죠스와 싸우게 되는 과정이다.
지역 시장 래리와 주민들은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희생자가 발생했음에도 해수욕장 폐쇄를 반대한다. 이들이 단지 욕심이 많다는 이유라기 보단, 여름 한 철 장사인 때에 해수욕장을 폐쇄한다는 결정이 주민들에겐 비합리적인 것이다. 또한 잘못된 상어를 잡았다며 축하 분위기를 깨는 것이 래리 시장에겐 비합리적인 것이다. 시장은 상어 전문가 톰 후퍼에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라 말하고, 톰 후퍼는 브로디 서장의 집에 찾아가 자신이 떠나면 마을의 유일한 합리적 판단력은 서장뿐이라 전한다. 이렇듯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합리적이라는 각자의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합리성은 자기 착각 혹은 자기 합리화일 뿐, 인물들은 제각기 감정에 휘둘려 있다. 식탁에 앉은 브로디 서장의 아들은 아빠의 행동을 따라 하며 그 감정을 배운다.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의 이성을 배우는 것이 아닌, 흘러나오는 감정을 체화하는 것이다.
브로디 서장이 이방인 출신이라는 설정 또한 인간 대 상어 이분법을 멀게 만드는 요소이다. 브로디네 가족은 영화의 등장과 동시에 자신들이 이사 온 사실을 상기시키는 대사와 함께한다. 이웃과의 대화에서도 언제쯤 섬사람이 될 수 있을지 푸념하고, 이사 오기 전 동네인 뉴욕을 그리워하며 스스로의 이방인 성격을 재차 되뇌인다. 하지만 브로디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라 차이를 두는 것은 아니다. 브로디의 직업이 경찰이기에, 지역 주민들이 여름철 장사를 해야 하는 이유에서처럼, 마침 그의 직업 수행이 시민들의 안전이었던 것뿐이다.
이렇듯 아미티 지역 주민들이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육지를 누빈 것과 같이, 죠스 역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바다를 누빈 것이다. 영화 속 이 바다 생명체는 ‘상어’(shark)라고 불리어지지만, 영화 밖에서 불리어지는 이름은 ‘jaws’이다. Jaws 즉, 턱은 상어가 공격력을 갖는 부위인 동시에 약점이 되는 부위이다. 죠스는 턱으로 사람들을 공격했지만, 동시에 턱으로 산소통을 문 채 놓지 않았고 그 욕구 행위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결국 죠스의 식인 행위는 아미티 주민들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행동으로 이웃의 죽음을 나은 것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해수면에 있는 인간을 공격한 것은 누구였을까. 우리가 타자라 여겼던 존재는 사실 우리와 꽤 닮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