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은 인류가 거대한 벽 안에 갇혀 살아가는 세계에서 시작된다. 벽 밖에는 거인들이 있고, 인류는 자신들의 절대적인 적이 거인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며 드러나는 진실은 충격적이다. 거인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벽 안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벽 밖에는 ‘진짜 세계’와 또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거인과 달리 절대적인 적도, 아군도 아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이때 에렌은 벽 안의 동족을 지키기 위해 벽 바깥의 인류를 대량 학살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랑하는 소수 사람들의 죽음 VS 모르는 다수 사람들의 죽음,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질문에 사람들이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은, 후자를 고를 시 파시즘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전자를 쉽게 고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이고 싶다. “피해자로 살 것인가 가해자로 살 것인가.” 에렌이 택한 죽음(모르는 다수 사람들의 죽음)에는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다수 사람들의 죽음을 택하는 순간 에렌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고, 가해자로 살 시에렌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내가 나를 죽이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에렌이 벽 바깥의 인류를 멸망시키는 대신, 동족의 자멸을 택했다면, 에렌은 살았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살았겠지. 그런데 그럼 복수에 매여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격의 거인(자유의 노예)인 에렌은 후자를 택하고 (내가 죽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사실 나는 이 만화의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야 말로 에렌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를 위해 등장인물들을 학살하고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태도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니까. 이렇게까지 하는데 호소력이 없기도 힘드니까. 그 마음만큼은 절절하게 닿는다. 하지만 다들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이마저도 이렇게까지 했기 때문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게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모를까? 나는 이 만화의 가장 미학적인 부분은 에렌이, "이유를 알았어. 내가 멍청해서 그래."라고 말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변명이나 연민 없이. 벽 바깥은 인간(폭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인간(폭력)뿐이라 다 없애버리고 싶었어. 라고 말해버리기 때문에. 이걸 실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욕구에 솔직한 말을 듣게 될 때 흔들리게 되는. 찬에렌 반에렌 입장이 갈리는 것도, 에렌이 내가 한 일은 정의를 위해서라느니 인류나 국가를 위해서라느니 같은 말로 포장을 안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자유롭고 싶어서 그랬어. 사랑하는 너희가 안 죽었으면 좋겠기에 그랬어. 잘못된 거 알아. 그러니까 나는 지옥 갈게. 지옥에서 만나자, 말하기 때문에. 사적인 부분을, 혹은 사적이지 않은 부분까지도 사적인 일로 발화하는 일을 해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더라도,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대체 뭘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게, 정말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