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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보기] [2025 제31회 동대문학상] 희곡·시나리오 부문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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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회
등록일
2025-11-18 16:26:24
조회수
74
희곡·시나리오 부문에는 총 8편이 투고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무덤덤한 무덤은 덤」과 「소행성」이 경합했다. 알다시피 희곡과 시나리오는 무대나 영상이라는 매체를 전제로 한다. 그만큼 문학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공간적 구성과 시각적 상상력 그리고 대사를 통한 주제 전달 능력 등이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장르인데 두 작품 모두 이러한 측면에서 상당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무덤덤한 무덤은 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존재들의 내면을 독특한 공간 설정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현대인의 실존적(實存的) 고뇌를 깊이 있게 탐구했으며 「소행성」은 인공지능과 가짜 뉴스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첨예한 문제를 극적으로 포착해냈다. 심사위원단들은 오랜 논의 끝에 「소행성」을 우수상으로 선정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리지만 먼저 「무덤덤한 무덤은 덤」이 보여준 철학적 깊이와 상징적 연출력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는 것이 두 작품 모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무덤덤한 무덤은 덤」은 문이 없는 폐쇄된 카페라는 독특한 공간 설정을 통해 삶을 잊지 못하고 잘못된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인 존재들이 모이는 일종의 연옥(煉獄) 같은 세계를 창조해냈다. 이 공간은 현실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며 주인은 끊임없이 컵을 닦다가 이내 바닥에 내던지는 반복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본질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만년 영화감독 지망생인 손님의 이야기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비겁함이라는 담벼락 뒤에 숨으려 했던 인간의 나약함을 다루고 있다. 커피의 미세한 조합이 무수한 맛을 만들어내듯 우리 삶 역시 선택의 순간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결국 비겁과 체념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 존재들의 초상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카프카적인 부조리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우리 스스로의 내면적 고립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대사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깊은 사유의 여지를 남긴다. 다만 이러한 존재론적 탐구가 다소 추상적이고 내향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목되었다.

「소행성」은 인공지능 기술과 딥페이크 그리고 가짜 뉴스가 일상을 지배하는 2020년대의 첨예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진실의 가치가 붕괴된 사회에서 우리가 스스로 초래하는 파국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가작(佳作)이다. 주인공 예진의 가족은 인공지능 봇이 바둑을 두는 예능을 시청하거나 인공지능 냉장고의 추천에 따라 식단을 짜고 심지어 인공지능이 사육했다고 광고하는 치킨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켜 먹는 모습을 통해 인공지능과 미디어에 순응한 현대인의 초상을 흥미롭게 포착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소행성 충돌이 임박했다는 자극적인 유튜브 영상이 올라왔을 때 가족들은 이를 조회수를 올리려는 장난질로 치부하는 순간 진정한 재앙이 시작되는 구조는 오늘날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둘러싼 조건이 초래할 최악의 시나리오를 심플하게 그러나 극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무덤덤한 무덤은 덤」이 보여준 철학적 여운과 존재론적 깊이는 분명 심사위원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소행성」이 제시하는 미디어 재난 시대의 직접적이고 사회적인 경고 메시지가 현 시점에서 더 긴급하고 보편적인 울림을 주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소행성」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작성일:2025-11-18 16:26:24 210.94.177.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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