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인터뷰] 봤으니까,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정재율 시인
우리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생 정재율은 시인이다. 정재율 시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정재율 시인은 어쩐지 곧고 견고한 나무 같다. 정재율 시인을 인터뷰하기 전, 나는 정재율이 성실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정재율이 성실한 까닭은, 그 누구보다 생명을 믿고 싶어 하는 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김해솔 안녕하세요. 정재율 시인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재율 안녕하세요. 저는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전공 박사수료생이자 시를 쓰고 있는 정재율이라고 합니다.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와 『온다는 믿음』을 썼고, 최근엔 기후 시 앤솔로지 『여름, 연루』를 출간했습니다. 내년 혹은 내후년에 아마 세 번째 시집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해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재율 요즘엔 광주에 있는 서점에서 상주 작가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전남권과 서울을 오가며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시 수업도 하고, 시 읽기 모임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시를 쓰기도 하고, 박사 수료를 했기 때문에 논문도 간간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은데, 확실히 어렵더라고요. 창작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게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소논문을 포함한 논문도 창작의 일종이긴 하지만요... 쉽지 않더라고요. 지금을 굳이 따지자면 연구자로서의 자아보다 작가로서의 자아가 조금 더 크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시를 창작하고, 수업을 하며, 함께 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김해솔 재율 시인의 시를 읽으면, 견고하고도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요. 말씀하실 때도 어쩐지 같은 태도가 느껴져 신기해요. 역시 시는 사람의 태도를 숨길 수가 없구나.... 싶달까요.
정재율 네. 저는 문학이, 특히 ‘시’라는 장르가 한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특정한 시를 쓸 때 했던 생각, 산책하면서 느꼈던 감각, 최근에 봤던 미디어, 작품들 등등. 이런 것들이 시 안에 그대로 들어오는 것 같아요. 우스갯소리로 (우스갯소리지만 굉장히 진지하게) 학생분들께 ‘시’라는 장르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게 제가 길잡이 역할은 해줄 수 있지만, 여러분들의 삶이나 세상을 바꿔줄 수는 없다, 그건 저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저 자체가 시를 굉장히 투명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요. 이수명 선생님이 쓰신 시론에서 인상 깊었던 게 있었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보다 대상을 정하고, 오히려 그 대상을 따라가면서 쓰는 것도 좋다는, 아마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처럼 학생분들이 쓰고 싶은 대상을 너무 과하게 쓰려고 할 때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아마 공감하시겠지만, 처음 의도와 달리 시가 후반부로 갈수록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세계로 아주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요. 잡고 있는 것보다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해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좀 긴장이 되는데요. 재율 시인이 제게 결여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요. 저는 종종 어떤 사람이 부럽냐는 질문을 받으면, “성실한 사람”이라고 대답하거든요. 재율 시인은 제가 느끼기에 그 누구보다 성실한 분인 것 같아요.
정재율 최근에 친구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본인을 생각했을 때 가장 좋은 점 혹은 장점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를 제삼자로 생각했을 때요. 근데 제가 첫 번째로 말한 게 성실이었어요. 성실도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가 경청이라고 했어요. 저는 경청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상대의 말이 끝나지 않는 이상 좀 기다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물론 때때로 어려울 수 있지만요. 요즘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중은 ‘경청’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정말 많이 생각해요. 제가 잘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작은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기본적인 관계 안에서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제 시도 그런 것 같은 거예요. 조곤 조곤 말하는 화자나 경청을 하는 화자,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묵묵히 듣고, 묵묵히 같이 걷는 화자가 주로 등장해요. 나아가 꼭 말하거나 경청할 대상이 없더라도 과거에 대화했던 순간을 복기하며 애도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화자가 등장하기도 해요. 지금 현재 없는 대상을 떠올리며 또다시 성실하게 경청하는 거죠.
김해솔 어쩐지 재율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주변 환경을 조용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고요한 곳에서 읽고 싶고. 왜냐하면 한 글자 한 글자를...... 뭐랄까, 좀 천천히 읽어야 될 것 같고 오래 머무르고 싶어지는. 시를 쓰는 사람도 그렇게 썼을 것만 같은. 그래서 정교하다는 인상을 저는 좀 많이 받았던 것 같고, 그게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습니다.
정재율 그렇게 말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무래도 저는 언어나 장면, 문장을 오래 씹고, 천천히 소화시킬 수 있는 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시 앞에서는 정말로 오래 머무르고 싶나 봐요. 제가 존경하는 시인님이자 박형준 교수님께서 시는 최소한의 언어를 가지고 최대로 보여주는 장르라고 말씀을 한 적 있는데, 그 말에 너무 공감이 가는 동시에 그 말 자체가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시는 결국 최소한의 언어를 가지고 얼마나 어떻게 잘 다루느냐, 그것을 어떤 이미지로 보여주느냐인 것 같은 거예요. 그 말을 듣고 하나 더 떠오른 건 결국 중요한 건 묘사일까? 하는 거였어요. 미술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다양한 선을 이용해서 기둥 하나를 만드는 것부터 연습을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필사의 방법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어떤 문장을 어떤 방법으로 연습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던 것 같아요. 시 안에서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을 때 순간적으로 우리는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문장을 해석하는 것과 그 문장이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니까요.
김해솔 흠, 말씀을 듣다 보니 묘사의 실종은 현대시가 종종 "난해하다"라고 평가받는 것은 꽤 연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재율 아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코로나 때문에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챗 GPT나 화면 속, 미디어 세상과 대화하는 게 훨씬 더 익숙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직접 느끼는 것보다 해석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김해솔 저도 좀 비슷한 생각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텍스트 과포화 시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거의 모든 의사소통이 실시간으로 텍스트화되고 영상을 보더라도 자막이 다 달리잖아요. 그러니까 영상 이미지가 강한 시대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되려 텍스트의 힘이 강한 시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해석해야만 하는 것도 너무 많고요. 시 속에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적어지는 것도, 어쩌면 언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물성 보다 커져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시를 접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현대시가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같은 생각도 들고요.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재율 시인이 하고 있는 작업, 씹을 수 있는 문장을 쓰는 일은 정말 귀하고, 고유한 작업 같아요.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 시가 있는데, 밥알을 씹는 장면이 있는 시가 있었거든요.
정재율 두 번째 시집 『온다는 믿음』에 수록된 시, 「숲2-나무인간」이라는 제목의 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곱게 갈린 죽을 소화시키는 시 맞지요?
김해솔 맞아요! 그 시를 보면서 재율 시인의 시가 회화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논문 때 다루신 김종삼 시인도 정말 회화적인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정재율 평소 전시나 그림에 관심이 많은 것도 있지만, 어떤 작품을 보고 느꼈던 감각들을 잊지 않고 기록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게 시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특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중에서 색채가 뚜렷한, 어두운 톤으로 그려진 그림이 유명한데 그런 그림도 좋아하지만, 스케치를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야기하다 보니까 김종삼 시인의「묵화」가 떠오르는데요. 이 시는 소와 할머니의 고된 하루를 보여주는 아주 짧은 시예요. 그런데 제목이 ‘묵화’다 보니까 검정색과 흰색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검정색을 사용해서 시에 나오는 소와 할머니의 존재감을 엄청 부각시키는 거죠. 말하자면 검정색과 흰색만을 사용해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시에 감정이 묵화처럼 스며들게 하는 거죠.
다시 에드워드 호퍼로 돌아와서 이야기해보자면 그가 거칠게 그린 선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 선들이 간혹 감정적으로 와닿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 이건 제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한 줄 한 줄 쓰는 문장과 그 선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거 아닐까 싶어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 <밤의 그림자>라는 작품인데요. 중절모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은 듯한 누군가가 거리를 걷는 그림이에요. 언뜻 보면 굉장히 평범한 작품일 수도 있는데, 이 그림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작가의 시선이에요. 시선 자체가 걷는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집 창문이나 옥상에서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사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선택할 수 있었겠죠. 거리로 나가 그 사람을 더 가까이에서 보거나 표정을 그려낼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러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오히려 그 거리감에서 고독하고 쓸쓸한 감정이 온전히 느껴져서 좋았던 것 같아요.
다시 시로 연결 지어서 이야기해보자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과정 속에서 사실 선택받지 못한 혹은 선택하지 못한 문장과 장면들이 많잖아요? 앞서 이야기한 그림의 시선처럼 화자와 함께 걸어갈 건지, 걸어가는 화자의 뒷모습을 볼 건지, 혹은 화자 대신 사물을 먼저 보여줄 것인지, 이 시선에 따라 시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하나의 장면을 선택함으로써 그에 따라 파생되는 문장이 엄청 세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을 보면서는 그 시선을 많이 체득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김해솔 오..... 저는 영화를 볼 때 종종 그런 시선을 체득하는 것 같아요. 이 위치에서, 이렇게 내가 너를 볼 수도 있었구나 싶어요. 정동이라는 건 몸이 있어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일까요? 재율 시인의 시를 보면 정동이 강하게 느껴져서, 몸을 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재율 사실 첫 번째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신체, 그러니까 신체의 전부가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어떤 감각을 느끼면 좋을 시들이 많아요.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장면이라든가, 사탕을 건네주는 장면이라든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생각하는 장면이라든가. 그리고 어떤 순간엔 산책을 하고, 어떤 순간엔 달리기도 하죠. 두 번째 시집 ‘온다는 믿음’으로 왔을 땐 먼저 떠난 이, 모리키씨를 온전히 기억하는 게 중요했어요. 단순히 죽음을 이야기하기보단 누군가를 위해 죽은, 사라지고 증발해버린 한 영혼에 관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음’과 ‘기억’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했죠.
김해솔 흥미롭군요. 몸에서 마음으로 이동하기.
정재율 모리키씨는 나무인간이에요. ‘은하철도 999’에 아주 짧게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열차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모리키씨를, 말하자면 몸이 존재하지 않는, 형체가 없는 모리키씨를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특히 모리키씨를 떠나보내고 난 후 밀려오는 감정과 상황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를 애도하고 추억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건 잊지 않고‘기억’하는 거였어요. 정보가 많이 없는 캐릭터라서, 순전히 제가 그 죽음에 대해서 2차 창작물처럼 그려냈어야 했어요. 한 사람이긴 하지만 열차에 존재하는 모리키씨, 열차에서 죽음을 맞이한 모리키씨 이렇게 나눠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왜 저희가 인간이 죽을 때 정말 ‘한 줌의 재’라는 표현을 할 만큼 엄청 납작해지고 가루 형태로 남잖아요. ‘은하철도 999’라는 특성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죽음을 맞이한 모리키씨는 별이 된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둠 속에 반짝이는, 빛나는 이미지들도 많이 그려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시집은 아쉬운 점도 분명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 모리키씨와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제가 원하는 형태에 가깝게 나온 작업이라는 점에서 되게 소중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김해솔 좋다... 혹시 세 번째 시집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으신지 스포를 살짝 해주실 수 있나요?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변화가 확실히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시 모리키씨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혹은, 이 시집들을 쓰면서 인간 정재율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정재율 최근에 제가 무릎에 이상이 있어 수술을 했는데요. 수술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조금 힘들었어요. 이 수술을 기점으로 바뀐 생각들이 있는데, 정말 많이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는 “왜 이렇게 못 해본 것들이 많을까” 였어요. 제가 워낙 안정인 걸 추구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다고 막 엄청 안정적으로 사는 것도 또 아닌데 말이죠. 엄청 들쑥들쑥하잖아요. (그렇다. 가장 불안정한 업인 시인이 되었으니...) 뭔가 도전도 많이 못 해본 것 같고, 너무 겁을 냈던 것 같은 거예요. 하다못해 여행이라도 좀 많이 가볼 걸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기한 게 수술하기 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었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막 펼쳐지는데, 올 여름 제가 기후 시 앤솔로지 <여름, 연루>를 준비하면서 가덕도라는 섬에 갔었어요. 그때 섬을 지키고 있는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딱 떠오르더라고요. 아주 고요하고, 아주 어두운 곳에서 불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그 순간 딱 떠오르는데, 수술 잘 마치고 다시 보러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뿐이더라고요. 참고로 반딧불이에 관한 시도 썼답니다.
김해솔 너무 좋은데요! 저는 반딧불이 한 번도 못 봤어요.
정재율 진짜 아름답고 진짜 커요. 반딧불이가 엄청 작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산에 있는 반딧불이는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제가 왜 하필 가덕도라는 섬을 갔냐면 신공항 건설 사업 때문에 이 섬을 없애려고 해서 지키려고 간 거였어요. 생명이나 생물이 파악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이 섬을 없애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보았잖아요. 그곳에 반딧불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저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래서 다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걸까요? 제가 대단한 활동가나 혁명가는 아니지만 그런 장면이 떠오른 거 보면 앞으로 나올 시집에도 종종 등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장면을 봤으니까, 이제는 뒤로 돌아갈 수가 없는 거죠. 되게 조심스럽지만 광장에서 보았던 것들, 숲에서 보았던 것들, 거리에서 보았던 것들이 제 마음속에 너무 콕콕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제 마음을 담은 몇 편의 시편들이 세 번째 시집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해솔 너무 좋다... 몸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으로 이동하기. 광장에서, 숲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보았던 생명들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재율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기대됩니다!
정재율 저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건강해라, 건강하고 또 건강하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많이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게 물리적으로 신체를 움직이는 것도 있지만, 마음의 운동성이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많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네요. 사실 제 요즘 진짜 고민은 쓰는 일에 관한 거예요.
김해솔 쓰는 일이요?
정재율 네. 요즘 쓰는 게 정말 많이 버겁다는 생각을 해요. 앞으로 저의 과제이기도 한데요. 앞서 말한 것처럼 최소한의 언어를 가지고 어떤 시를 보여줄까 고민도 되고요. 또 쓰는 일이 조금은 더 즐거워졌으면 좋겠다, 즐겁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이 되기도 해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면 독자분들이 있는 한 그래도 썼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요. 제가 종종 기도를 드릴 때 하는 말이 있는데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힘과 현명함 그리고 지혜를 달라는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거에도 굴하지 않고, 썼으면 좋겠다, 이게 가장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