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재 에필로그] 지성을 겸비한 바보가 되는 시간

2025-09-22     신하연 편집위원
△ 사진= 카페 테라스에 앉아 그린 그림

  세번째 파리였다. 첫번째 파리는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갔고, 두번째 파리는 학부시절 교환학생 때 간 여행이었다. 웬만한 명소는 다 가보았고, 대략적 지도는 머리 속에 있었기에, 해외 취재의 도시로 더없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해외에 나가더라도 한번 가본 곳을 다시 가는 것과 안가본 곳을 새로이 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한번만 다녀와도 그 도시에 대해 습득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AI로인한 경험의 멸종이라고 어딘가에선 들려오지만 공감하기 힘든 주장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지식의 앎이라는 인식론적 차원이라기 보다, 내 몸으로 직접 느끼고 촉각하는 현상학적으로 설명되는 바가 더 크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세번째 파리는 두번째 파리보다 컸고, 두번째 파리는 첫번째 파리보다 컸다.

△ 사진= 뤽상부르 공원

  에두아르 르베는 외국에서의 시간을 지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바보가 되는 경험이라 비유했다. 그러한 경험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얼마나 특수한 환경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내가 정주민으로 있는 이 나라에선 항상 관습화되고 암묵적으로 지켜야하는 코드에 맞춰 내 행동거지를 단속해야한다. 아무리 사소한 말씨나 손짓마저도 사실은 이 곳에서 자연스레 학습된 것이니까. 반면 낯선 도시의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나의 코드가 그들의 코드와 균열을 일으켜도, 이해받고 오히려 긍정적 관심의 대상이 될 때도 있다.

  취재를 망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파리에 도착한 첫 이삼일은 약간의 긴장 속에 움직였다. 무시할 수 없는 시차와 경유를 통해 거의 이틀만에 도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몸은 피곤했어도, 두 눈은 이 아름다운 도시의 골목 골목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쉴 새 없이 자극을 받아들였다.

  에펠탑, 루브르, 오르세 유명한 명소들은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구경이었다. 그렇다고 이 먼 파리까지 왔는데 안가볼 순 없으니, 사람을 보더라도 결국 방문한 것이다. 그 장소 자체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에펠탑 앞에서 본 두세살 배기 아기와 같이 사진찍으며 논 것, 루브르 입장 줄 앞에 선 폴란드 가족여행 분들과 간단히 나눈 대화 이런 기억들이다. 나의 익명을 유지하고, 상대의 익명도 유지한 채 나눌 수 있었던 대화들. 그 사람의 이름도 나이도 모를테지만, 그 대화를 나눈 순간들은 아마 두고 두고 기억할 것 같다.

△ 사진=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어쩌면 해외생활이 맞는걸까 싶다가도, 사실 그저 정착하지 않는 유목생활, 영원히 이방인으로써만 존재하는 유랑생활이 맞는데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해외에만 나갔다 돌아오면 다른 이들처럼 김치찌개를 찾는 것이 아닌, 몸은 귀국했어도 정신머리는 여전히 외국에 분리되어 있는 듯한 이 한동안의 정체모를 들뜸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