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해외취재] 도시재생이 빚은 문화예술의 장, 힙스터 이스탄불
발랏·베이올루 일대, 정부 주도 도시재생 사업으로 활기 되찾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주민과 소상공인 밀려나는 등 문제 발생해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투명하고 협력적인 도시계획 필요”
한때 낡은 집과 빈 골목만 남아 있던 이스탄불(İstanbul)의 발랏(Balat)와 베이올루(Beyoğlu). 하지만 하나둘씩 자리 잡은 예술가들이 거리에 색을 입히자, 죽어가던 골목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은 ‘힙스터 이스탄불’로 불리며 SNS를 타고 전 세계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에 오르고 있다.
발랏, 낡은 벽돌 위에 예술의 숨결을 새기다
이스탄불 구시가지 파티흐 지구 북쪽, 골든혼 해안 언덕에 자리한 발랏.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동시에 발랏은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가 깊이 배어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15세기 말 발랏은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정착하며 ‘작은 유럽’처럼 번영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부유층은 도시 외곽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빈곤층과 난민의 유입으로 동네는 급속히 노후화됐다. 전환점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된 ‘페네르-발랏 재활사업’이다. 역사적 건물 복원과 주거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 이 사업으로 낡은 벽돌집은 보수되고 오래된 목조건물은 다시 빛을 찾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건물 외벽에는 벽화가 그려지고 좁은 계단 위에는 소규모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섰다. 세계 각지의 그래피티 작가들이 발랏을 찾으며 SNS에는 ‘사진 명소’로 태그된 골목이 끊임없이 공유됐다. 여행자들은 이후 발랏을 ‘힙스터의 성지’라 부르며 인증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다.
발랏은 자갈길과 19세기 주택이 주는 매력적인 도시 경관 덕에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많다. <Şöför Nebahat> <Mahalle Arkadaşları> <Ah Güzelİstanbul> 등 명작 영화들이 발랏을 배경으로 삼았고 최근에는 <테이큰 2>, <007 스카이폴>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이곳을 주목했다. 발랏을 무대 삼은 TV 드라마 <Cennet Mahallesi> <Ezel> 등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관광객 증가와 임대료 급등으로 발랏에서는 원주민 ‘둥지 내몰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지 상인 아흐메드(가명) 씨는 “5년 전만 해도 이 거리에는 버려진 집밖에 없었다”며 “지금은 카페와 관광객으로 넘쳐나지만 결국 오래 살던 이웃들은 모두 떠났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발랏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단순한 원주민-신규 유입자 구도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파티흐 에렌 이스탄불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발랏은 오랜 세월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해온 지역으로 원래 특정 집단만의 공간이 아니었다”며 “중요한 것은 ‘누가 주인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가”라고 전했다.
베이올루, 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교차로
이스탄불 신시가지 북쪽,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 너머에 자리한 베이올루는 오스만 제국 후기부터 유럽인과 레반틴 상인, 외국 공관이 모여들며 ‘동방의 파리’로 불린 지역이다. 서양식 건축과 상업·문화 시설이 집약된 이곳은 이스탄불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나 1970~80년대 이후 쇠퇴를 겪으며 빈 건물이 늘고 범죄율이 높아져 방문객들이 발걸음이 끊기기 시작했다. 재생의 바람은 1980~90년대 다시 불어왔다. 역사적 건물 복원, 보행자 전용도로 조성, 노면전차 복원 등이 추진되며 베이올루는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베이올루는 대형 서점과 미술관이 들어서고, 국제 영화제와 음악 축제가 열리며 마침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동시에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이스티클랄 거리(İstiklâl Caddesi) 일대에는 글로벌 브랜드 매장, 대형 쇼핑센터, 프랜차이즈 카페가 줄지어 들어서면서 임대료가 폭등했다. 소규모 예술 공간과 독립 카페는 자리를 잃기 시작했고, 기존 주민들은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외곽으로 밀려났다. 튀르키예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거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단기 임대자와 관광객이 늘었다. 베이올루에서 수년간 카이막 매장을 운영해온 무스타파(가명) 씨는 “이곳의 임대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올라 하루가 다르게 가게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베이올루 역사유산의 보존과 경제 지속 가능성 사이 균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에렌 교수는 “베이올루는 역사, 문화, 사회적 자산이 풍부한 지역이지만 재개발로 인해 ‘문화 공간의 상업화’가 일어났다”며 “이는 지역 예술가와 영세 자영업자에게 경제적 부담을 안길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투명하고 협력적인 도시계획을 통해 베이올루의 고유성을 지키며 사회적 통합과 경제적 활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새로운 실험실 이스탄불
한편 이스탄불의 젠트리피케이션 양상은 전형적인 모습을 띠면서도 독특한 양상을 지닌다. 에렌 교수는 “이스탄불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라며 “수천 년의 역사와 다양한 공동체가 뒤섞인 도시라 새로 유입된 예술가나 창업자들이 기존 주민과 교류하며 문화적 혼종화(Cultural Hybridisation)를 만들어내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에렌 교수는 이스탄불 도시재생의 촉매제로서 ‘예술가’에도 주목했다. 다만 그는 “예술가가 들어오면 집값과 임대료가 오르고, 결국 그들 자신도 밀려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며 공공의 정책적 개입 없이는 공존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법으로 ▲임대료 규제 및 장기 임대 제도 ▲소규모 상인·예술가 지원 기금 ▲공동체 기반의 사회적 영향 평가 제도 등을 덧붙였다.
과거와 미래, 지역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이스탄불의 잠재력은 단순한 서구의 젠트리피케이션 양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스탄불은 수천 년 동안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혼재해 온 역사적 배경 위에 현대 예술가와 창업자들이 섞이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시 재생과 관광, 상업화가 맞물린 젠트리피케이션을 단순한 문제로 보기보다 공공 정책과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균형을 잡는 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