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웅얼거림에 귀 기울여준 사람

2025-06-02     이강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전공 22
▲이강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전공 22

몇 개월 전, 텔레비전으로 밴드 실리카겔의 무대를 보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아 함께 보시던 어머니께서는 “쟤네는 너무 웅얼거린다. 무슨 소린지 하나두 모르겠어.” 하시더니

“엄마가 화면 안 보고 소리만 듣고 무슨 가사인지 맞혀볼게.”라며 몸을 돌리시고는 혼자서 <놀라운 토요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실리카겔은 가사를 보지 않고는 알아채기 거의 불가능한 장르의 음악을 하는 밴드입니다.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한 줄도 맞히시질 못했습니다. 

“깨끗한 곳에서 홀로 있어요”는 “계곡에, 서울에 있어요”가 되고, 다른 가사들도 줄줄이 엉뚱한 말들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말소리가 음악을 덮는 것이 짜증나서, 조용히 좀 하시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멋쩍게 웃고 조용히 음악을 들으셨습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녀의 관심이 따뜻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봐주고, 제 글을 읽어주고, 제가 듣는 노래를 함께 들으며 그 노래의 가사를 궁금해해 주었습니다.

가사를 들으면 좋은 부분을 집어 말하고, 진심으로 웃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따뜻함이 좋아서, 누군가 이상형을 물을 때

한동안 “내가 듣는 노래의 가사를 궁금해해 주는 사람”이라 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걷던 밤거리, 나누어 꽂은 이어폰 속으로 실리카겔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기타의 잔향과 목소리의 웅얼거림 사이로, 그녀는 가사를 물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가사창을 켜서 휴대폰을 건넸습니다. 

“백만 가지 재앙 속에서도 성실하게 지킬뿐이라고. 내 입속에 태양이 들었다고.” 

그녀는 한참 가사를 들여다보더니 

“이 부분이 진짜 좋다.”

작게, 그리고 예쁘게 웃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웃음에서 오래전 어머니의 멋쩍은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그저 감상을 방해하는 소음처럼만 여겼던 어머니의 말들. 

그 말들이 실은, 아들이 듣는 음악에 대해 알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직접 묻지 못하고, 에둘러 표현한 방식이 그저 어머니 혼자서 가사를 맞혀보려는 일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조용히 아려왔습니다.

 

어머니께 저는 언제나 웅얼대는 노래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흘리는 말투로 짜증만 내는, 알아들으려면 퀴즈를 풀듯 해야 하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의 전화가 올 때면 대충 대답하고 “이제 그만 끊어요.”라며 줄이던 제 모습이,

조금 전에도 그녀 앞이란 이유로 “알아서 들어갈게요.”라는 말로 전화를 서둘러 끊던 제 모습이,

그 모든 웅얼대던 순간이 스쳐갔습니다. 

엄마야말로 내가 듣는 노래의 가사를, 나의 웅얼거림을 가장 오랫동안 궁금해해 준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옹알이부터 사춘기를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말입니다. 

가사처럼 검색한다고 알 수도 없는 아들의 짜증과 침묵을 혼자서 유추하고, 맞혀보셨을 어머니. 그 뒷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웅얼거리듯 흘려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마음을 그저 그렇게 지나쳐왔을까.

 

웅얼대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이제는 똑똑하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노래는 웅얼대도 장르가 되지만, 표현은 그저 어렵고 먼 말이 되기 일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