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여전히 서투른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유독 마음이 저릿했던 봄이었다. ‘정말 수고했습니다’라는 말을 곧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작품, <폭싹 속았수다>는 혐오의 시대에도 사랑은 존재함을 의미하는 듯, 싫증 난 사회와 일상을 잠시나마 사랑으로 굴러가게 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한 탓에 10년 가까이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이 때문에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한데도, 기억 속 가장 따뜻한 장면은 늘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이다. 그중에서도 엄마와 함께 했던 그날이 정말 나에게는 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도 채 안 나는 그 흐릿한 기억. 연인 시절부터 돈 한 푼 아낀다고 영화 데이트 한 번 안 해봤다던 엄마가 나를 위해 반차를 썼더랜다. 매번 유치원에 남아 엄마의 늦은 퇴근을 기다리며 선생님과 긴 시간을 보내던 내가, 햇볕이 쨍쨍한 오후에 유치원도 가지 않고, 엄마 손을 잡은 채 돌아다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영화관, 그리고 영화 “꿀벌 대소동.” 영화 속 전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당시의 서면 길거리는 아직도 선명하다. 영화의 내용보다도, 그날의 엄마가 내게는 영화였다.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물어보면 머뭇거렸던 내가,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난, 내 인생 첫 영화를 엄마와 함께 했다.
그토록 엄마와의 시간이 소중한 나에게, 동생이 하나, 둘 태어났다. 휴지 한 갑의 바닥이 보이도록 엉엉 울었더랜다. 엄마의 품을 나눠야 하는 게 싫었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고,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짜증과 투정으로 흘러넘쳤다.
고교 시절엔 기숙사 생활을 하고, 대학 진학으로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따뜻한 밥이 없고, 아플 때 혼자서 물을 끓여 마시게 된 후에야 깨달았다. 늘 곁에 있던 부모님의 손길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그들의 사랑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루 세 끼를 챙기고, 빨래를 걷어 개는 일, 퇴근하고도 우리의 하루를 매만져주는 그런 일상이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한 달 전, 엄마가 반찬을 한가득 들고 충무로역에 서 있었다. 그날 엄마 손에 들려 있던 반찬들이 냉장고를 가득 채운 모습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말 대신 밥상에 담긴 사랑을 보며, 나는 또다시 깨닫는다. 아직도 서툴게 배우고 있는 사랑은, 엄마에게는 평생 해온 일이었음을.
그런데도 요즘도 엄마가 서울에 올라올 때면, 집안부터 치우고 나서야 겨우 앉는 엄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낸다.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는 후회, 그 사랑이 어떤 희생과 배려로 이루어졌는지를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온다. 그런 단순한 감정에 휩쓸려, 또다시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가 내려가고 나면, 또다시 후회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그런 서투른 사랑을 하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사랑을 많이 돌고 돌아 배운다. 어릴 적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던 나와, 이제는 그 사랑을 이해하려 애쓰는 내가 공존한다. 애인이나 친구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 “사랑해.” 유독 가족에게는 어렵다. 가족 앞에서는 늘 입안에서만 맴돈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 거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 후회감에,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매일 한 번씩은 꼭 통화를 하며 하루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자기 직전에도 꼭 안부를 전한다.
아마 사랑이란, 원래 서툰 감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서툰 사랑을 한다. 하지만 그 서툰 사랑 안에 담긴 진심이, 우리가 서로를 놓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힘일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우리는 서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담담함을 배워간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서투른 사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