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악로에서] 가벼운 말들 속에서 지워지는 누군가
대학가를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학우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얼굴에 비비크림을 바르는 남학우를 향해 한 학우가 “게이냐”고 장난스레 묻는다. 이 한마디에 배를 붙잡으며 더 거세게 웃는 학우들. 그 순간 누군가는 덜컥 내려앉는 마음에 심장을 붙잡는다. 농담처럼 보였지만, 결코 농담이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분명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증오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근함을 가장한 농담, 모두가 웃고 지나치는 대화 속에서 은밀하게, 또 교묘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듯 뱉은 혐오 표현 한마디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이들이 우리 곁에 반드시 존재한다.
성소수자 학우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은 채 비성소수자 집단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성소수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끼리니까 괜찮다”는 말은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존재들은 종종 그 무심한 말들의 표적이 되고,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 웃고,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하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는 마음의 문을 더 단단히 걸어 잠근다. 이런 비극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결국 그 침묵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칼날이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데 있다. 가해자는 대부분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폭력이나 의도적인 조롱이 아니었다고 해서 상처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무심함이 어떤 폭력보다 깊게 파고들 수 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라는 포장으로는 이미 흔들린 자존감과 부정당한 정체성을 되돌릴 수 없다. 가볍게 흘려보낸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처럼 혐오 표현에 무지한 채 이들의 상처를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 분위기가 어느새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웃지 않으면 되레 ‘유난’이라는 압박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유난스러워야 한다. 침묵하는 이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의 용기는 더 크게 빛난다. 이제는 불편한 언행에 웃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선을 긋는 사람이 필요한 때다. 그런 유난스러움이 하나둘 모여, 장난과 농담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이 당연한 분위기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다.
차별은 언제나 드러나 있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레 헤아려야 한다. 누군가의 아픔이 따르는 웃음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단체 채팅방, 스터디 모임, 술자리에서 누군가는 웃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도 조용히 지워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저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멈추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학우를 고려하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순간이 될 수 있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언어가 하나둘 모일 때, 비로소 이곳은 모두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런 대학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