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청와대, 권력의 상징에서 시민의 뜰로

청와대 누적 방문객 700만 명 돌파 권력의 중심에서 시민을 위한 문화유산으로 “청와대 미래 활용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 추진해야”

2025-05-12     김지윤 기자
▲청와대를 찾은 시민들이 내부 관람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사진=김지윤 기자.)

한때 높은 담벼락과 삼엄한 경호 속에 감춰졌던 국가 권력의 심장부, 청와대가 어느덧 개방 2년차를 맞았다. 미지의 영역이던 그곳은 이제 수많은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새로운 숨결을 되찾았다. 국빈을 맞이하던 영빈관의 장중함, 국가 중추를 상징하던 본관의 위엄, 바쁜 국정 속 쉼터가 됐던 관저의 고즈넉함까지. 청와대 곳곳은 과거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공간을 새롭게 마주한 이들의 시선 속에서 또 다른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권력의 상징에서 시민의 공간으로 변화한 청와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이곳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또 사용돼야 하는가’

▲영빈관 외관 (사진=김지윤 기자.)

봄날의 청와대를 걷다

경복궁역 4번 출구를 나와 북악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돌담길을 걷다 보면, 녹음이 짙게 드리운 풍경 사이로 흰 외벽의 거대한 건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전통 기와지붕이 줄지어 선 청와대 경내에서 유독 이국적인 자태로 시선을 끄는 곳, 바로 영빈관이다. 18개의 석조 기둥이 건물을 떠받친 웅장한 외관이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풍 대칭 구조는 푸른 기와와 한옥 양식이 중심인 청와대 경내에 이질적이고도 강렬한 느낌을 준다. 냉정하고도 장엄한 기운이 감도는 이 공간에는 한때 국가 외교의 전초기지로서 역할했던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조선시대 왕이 걷던 어도를 본뜬 앞마당과 전통 수호상인 해치상이 전통의 숨결을 간직한 채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맞닿는 경계에서 영빈관은 단순히 의전 공간을 넘어 청와대의 복합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서 있다.

영빈관을 나와 오른편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청와대의 상징이자 중심 공간인 본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통 기와지붕 아래 단정한 외관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양갈래로 뻗은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1층에는 ▲충무실 ▲인왕실 ▲무궁화실이,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접견실이 자리하고 있다. ▲충무실은 외빈 만찬 등 주요 의전 행사가 열리던 공간으로, 이순신 장군의 시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바닥 카펫은 거북선 문양을 새겨 충무공의 정신을 형상화했다. ▲인왕실은 외국 정상과의 기자회견이나 소규모 연회가 열리던 장소다. 벽을 장식한 전혁림 화백의 대작 「통영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요청한 작품으로, 정치적 부침 속에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 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본관 맨 끝쪽에 위치한 ▲무궁화실은 영부인의 집무실 겸 접견 공간이다. 하얀 테이블과 벽면에 걸린 역대 영부인 초상화가 절제미를 더한다. 2층 ▲대통령 집무실에는 무궁화 한 송이와 두 봉황 문양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고 ▲접견실에는 금빛 ‘십장생문양도’가 동쪽 벽에 걸려 있다. 용도와 격식은 달라도, 이들 공간은 모두 국가의 중요한 시간을 담아냈던 청와대 본관의 얼굴이자 권력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던 무대였다.

본관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면, 청와대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대통령의 일상과 가장 가까웠던 관저가 나온다. 푸른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아래 ‘ㄱ’자 형태로 자리한 관저는 전통 한옥의 미감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건물은 대통령 가족이 머물던 본채와 손님을 접대하던 별채로 구성돼 있고 마당 한켠에는 ‘청와대에서의 평안함’을 뜻하는 사랑채, 청안당이 아담하게 놓여 있다. 실제 생활 공간이었던 만큼 장식이 절제돼 있고, 그 덕분에 고즈넉하고 담백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사랑채 마당에서 기자는 어린아이와 함께 온 30대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아이들과 함께 책에서만 보던 공간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뜻깊다”고 말했다.

▲계단에서 바라본 상춘재 (사진=김지윤 기자.)

이어 방문한 곳은 청와대 경내에 처음 세워진 전통 한옥, 상춘재다. ‘늘 봄이 깃든다’는 이름처럼 이곳은 바쁜 국정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는 쉼의 공간이었다. 청와대에서도 유난히 한적한 자리에 놓인 상춘재는 단정한 처마선과 고요한 정취로 담백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특히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는 온돌방에 마주 앉아 차를 나누는 경험을 통해 한국 전통의 미학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장소로도 사랑받았다. 이처럼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때론 외교의 격을 낮추고 진심을 이끌어내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청와대가 있기까지

청와대의 역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북악산 자락에 자리한 관저를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이곳을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4·19 혁명 이후 윤보선 전 대통령이 일제 잔재를 지우고자 명칭 변경을 추진했고, 경무대는 푸른 기와를 얹은 전통 한옥 양식에서 착안한 ‘청와대’로 다시 거듭났다. 이름이 바뀐 뒤, 청와대는 단순한 행정 공간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품은 정치의 무대로 자리 잡았다.

이후 대통령 중심제가 강화되면서 청와대는 국가 통치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노태우 정부 집권 시기에는 본관과 영빈관, 관저 등 주요 시설이 정비되며 현재의 청와대 외형을 갖췄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정보화 시스템이 도입되며 일부 공간이 제한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대통령 집무실이 서울 용산구로 이전되면서 청와대는 사상 처음으로 전면 개방됐다. 침묵과 권력의 공간이던 청와대는 이제 비로소 국정과 시민 사이의 흐린 경계를 걷고 열린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청와대가 나아가야 할 길은

개방 이후 청와대는 700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을 맞았다.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와대’라는 슬로건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역사와 권력의 공간이 시민의 일상으로 녹아들며 새로운 역할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뜨거운 관심에 비해 이 공간이 앞으로 어떤 의미를 품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여전히 미진하다. 우정무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와대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주요 결정이 이뤄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라며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 문제와 함께 여러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를 고려해 미래 활용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의 철문은 이미 열렸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물리적 개방을 넘어,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청와대가 과거의 유산이 아닌, 살아 있는 시민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의 폭넓고 진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그동안 청와대는 단순한 집무 공간을 넘어 국가 권력의 중심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적 무대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이 비워지고 공간만 남은 지금, 그 상징성은 점차 흐릿해지고 있다. 국민의 신뢰를 담보하고, 국가의 미래를 견인할 상징으로서의 청와대. 그 정체성과 방향성은 이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사회적 합의와 시민의 상상력 위에서 다시 써져야 한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청와대는 이제 변화와 도전으로 채워질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