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나 천강에] 치열하게 불안한 법
치열하고 한편으로는 엄혹한, 불안과 알 수 없는 분노가 팽배했던 시간 동안에도 우리의 강의실에서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의실 밖에는 초조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날카로운 말들이 횡행해서 그 언어가 내 언어가 되지 않도록 한껏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했던 문학가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문학은 인간의 손에 인간의 문제를 돌려주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지극히 개인적 속성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동안에도 사람들의 말은 더욱 위협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무력감마저 몸을 부풀리기 시작하던 때였다. 정당하지 못한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 벌어지는 현실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야 할 것만 같은,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은 시기였다.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는 일은, 무력한 걸까.
일본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사사키 아타루는 읽기에서 혁명이 시작된다고 적었다. 루터의 텍스트 읽기와 번역은 독일농민전쟁을, 사회의 변혁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기존의 텍스트를 그저 수용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읽고, 해석하고,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기존의 문법을 이해하고 새로운 것으로 해석하는 변혁의 과정이다. 문학에는 혁명의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금 위로가 된다.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외면하며 때로는 행동하면서 한 계절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날씨가 한결 풀렸는데도 즐겁지만은 않다. 지나온 불면과 불안의 밤이 길었기 때문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날 세운 언어의 기억을 지우기 어렵다. 선의가 부정당한 것 같던 무력감이 마음 한켠에 진득하게 남아 있다. 그간 신뢰했던 것들이 옳다고 계속 믿어도 괜찮은 것인지도 불안하고 염려스럽다. 세계는 여전히 불공평하게 점점 더 좁아지는데 나는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만 같다.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든다.
다시 책을 펼친다. 읽을 수밖에, 읽고 해석하고 다시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옳은지 제대로 된 해석인지 불안하고 어렵기만 하다. 그래도 읽기로 한다. 읽고 내 언어로 번역한다. 타인에게서 내 문제의 원인을 찾거나 불안을 분노로 바꾸는 대신 그저 계속 불안해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나 자신을 의심하고 내 이해와 생각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한 문장씩 읽고 해석한다. 텍스트를 읽고 의심하고 해석하다 보면 세계를 의심하면서도 해석할 수 있는 나의 언어가 생기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읽기가 변혁으로 이어지리라고 믿어본다.
살레츨은 그의 책 『불안들』을 맺으면서 한 미군 지휘관의 말을 인용했다. “불안이 전혀 없는 병사를 볼 때 저는 정말로 조심하고 경계합니다.” 살레츨의 말대로 불안이 없는 사회도 오히려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안은 오히려 사회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이 없으면 오히려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 일견 불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격한 감정들에 휘말리기보다 불안함 속에서도 읽어가는 것. 읽기의 성찰이 우리의 힘이 되는 이유다.
올해도 교정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연등이 걸리고 밤이면 환상 같은 풍경이 펼쳐질 테다. 늘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벚꽃이 피면 중간고사가 가까웠다는 뜻이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할까 불안해도 괜찮다. 적어도 나 자신을 의심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 모두의 불안과 읽기와 번역을, 그리고 변혁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