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TO BE’ 그리고 ‘NOT TO BE’

2025-04-14     김경래 불교대학 부교수
▲김경래 불교대학 부교수.

4월은 만우절로 시작한다. 장국영의 광팬이었기에 2003년 이후 만우절은 온전히 그를 추모하는 날이 되었다. 기억 속 장국영은 언제나 양극의 모습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밝음과 어둠, 해맑음과 상처, 선량과 불량. 그가 연기했던 인물들은 항상 이 양극단을 오가며 방황하고 있었다.

 마치 여름과 가을처럼, 결코 만날 수 없고 만나서도 안되는 것들 간의 만남은 인간의 미묘한 정서를 자극한다.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양극성의 합일로 해석한다. 실제로 종교사에서 양극성은 근동지역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사탄과 신의 협업으로 표출되기도 했었다. 신과 사탄 간의 종교적 긴장감은 그 자체로 폭발적인 대중성을 확보했었고, 이는 사파가 지녔던 열광적 정서로 이어졌다. 이후 이것이 정파의 정서 속에 안착하게 되면서 일반 종교는 물론 문학과 예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오직 초월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이 양극성의 합일은, 그렇기에 평범한 인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으로 다가온다. 충성과 반역 사이에서 파멸을 맞이하는 맥베스, 뿌리 깊은 원한과 사랑 사이에서 희생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언제나 양극을 연기했던 장국영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동을 주었고, 또한 (실제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한결같이 비극적이었다.

 ‘마라(Māra)’는 불교전통 속에서 양극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매력적인 사신(死神)이다. 그는 수행자들이 초월의 길로 접어들 때마다 등장하여 폭력적인 행위로 두려움을 선사하거나, 논리적인 사유로 초월의 길을 단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마라의 등장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악의 극단’인 마라와의 조우는 곧 수행자가 그 반대의 극단인 ‘초월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게으르고 무능한 수행자는 마라를 만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모종의 목표에 매진하거나 무언가를 애정할 경우 어김없이 장애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과 좌절이 아닌 노력과 성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해야 할 것과 해선 안되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 쟁취해야 할 것과 단념해야 할 것. 이들 양극단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하거나(to be)’ 혹은 ‘하지 않는 것(not to be)’ 양자택일뿐이다. 양자를 적절히 취하는 것은 지혜가 아닌, 착각이고 오만이다. 그것은 인간미 없는 모습 혹은 초월자를 짐짓 흉내 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혼란에 빠져 방황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며,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며 양극의 선택 앞에 주저하는 ‘나’를 발견한다면, 비록 해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보라 하더라도,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