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해외취재] 상처를 딛고 피어난 푸른 섬, 오키나와

태평양 전쟁의 격렬했던 최후 격전지, 오키나와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추모하는 평화기념공원 ‘류큐 왕국’ 문화유산 슈리성, 복원 통해 정체성 고취해

2025-03-24     양라윤·이하영·임지연 기자

사시사철 아름다운 바다와 온화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 섬 오키나와. 일본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과 풍부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휴양지다. 그러나 푸른 섬 오키나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픈 역사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겨울 동대신문 해외취재단이 오키나와로 향했다.

▲오키나와 전통 수호동물 ‘시사(シ-サ-)’상 (사진=임지연 기자.)

 

‘철의 폭풍’이 휩쓸고 간 섬, 오키나와

지난 1월 오키나와에 도착한 취재단은 영상 10도를 훌쩍 넘을 만큼 따뜻한 오키나와의 겨울 날씨에 두꺼운 겉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나하 공항을 빠져나오자,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열대 식물들 사이로 미국풍 기념품과 미국식 음식점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의 행정 구역이지만 본토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오키나와에 미국식 문화와 일본 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문화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오키나와 주요 타임라인 (일러스트=이하영 기자.)

오키나와는 약 150년 전까지만 해도 ‘류큐’라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류큐 왕국은 청나라와 일본 등에 조공을 보내는 양속 체제를 유지하며, 주변 국가들과의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1872년 일본 정부는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류큐 왕국을 일본의 지방 행정구역에 강제 편입했다. 이어 1879년에는 제2차 류큐 처분으로 류큐라는 이름을 없애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이후 일본은 일본어 보급과 창씨개명 등 동화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오키나와를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오키나와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본토와 다른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오키나와는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격전지가 됐다. 태풍처럼 휘몰아친 포탄과 화염으로 ‘철의 폭풍’이라 불린 전투에서 오키나와는 83일간 전례 없는 규모의 함포 사격과 폭격, 지상전으로 인해 초토화됐다. 미군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오키나와를 점령하고자 했고, 일본군은 일본 본토에서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끝까지 저항했다.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하거나 가족과 이웃끼리 서로를 죽이도록 지시했다. 한라대학교 강창일 석좌교수는 “한때 일본과 독립된 왕국이었던 류큐 왕국의 정체성을 가진 오키나와인들이 미군의 편에 설 것을 두려워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집단 자결을 강요하기도 했다”며 “일본군의 야만적인 행위로 오키나와인 10만여 명이 사살 및 집단 자결을 당했다”고 전했다. 당시 오키나와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전쟁으로 인해 희생됐다.

전쟁이 끝난 후 오키나와는 미군정 통치하에 놓였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오키나와만은 예외였다. 미군정이 계속되면서 오키나와는 사실상 미국의 군사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달러화가 통용됐고, 미국식 학교와 가게들이 생겨났다. 오키나와는 1972년이 돼서야 일본으로 반환됐으나 미군기지는 여전히 오키나와 면적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일본 내 미군기지의 70%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실정이다. 미군기지가 밀집된 지역에는 영어 간판과 미국식 문화가 남아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미군기지의 과도한 집중으로 인한 군사적 부담과 환경 피해를 호소하며 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강 교수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관할하는 곳이기에 일본 정부가 독단적으로 철수나 이전을 결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하지만 미군기지 문제는 오키나와의 사회적 문제이기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평화 운동과 혁신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키나와 전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닌,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문제이자 오키나와의 상처로 남아 있다.

 

평화기념공원, 전쟁의 참혹한 흔적을 더듬다

취재단은 오키나와 전투의 최후 격전지였던 오키나와섬 남부 이토만시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전쟁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평화기념공원에는 당시 처절했던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의 한국인 위령탑 (사진=임지연 기자.)

평화기념공원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한국인 위령탑’이다. 공원 내부에는 일본의 현과 여러 나라의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1만여 명의 한국인 군무원들은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의 광기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국인 위령탑 입구의 비문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이은상 시인의 시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태극기가 그려진 제단 위에는 누군가 놓고 간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 봉분의 형태와 닮아 있는 둥근 위령탑을 쌓은 돌들은 한국 각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위령탑 앞의 바닥에는 큰 화살표 문양의 금속판이 설치돼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이 위치한 방향을 가리켜 타지에서 비통한 죽음을 맞은 이들의 길 잃은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의 평화기념자료관 (사진=임지연 기자.)

공원 내 평화기념자료관은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담은 자료들이 전시된 곳이다. 2층에 위치한 상설 전시관은 5가지 테마로 구성돼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 발발까지의 세계사적 흐름 및 전투의 과정은 물론, 종전 이후 미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일본에 반환된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를 만나볼 수 있었다. 전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실물 기록들은 소모적인 전투로 삶의 터전을 잃고 잔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전쟁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췄다. 전시실 내부의 책상 위에 놓인 여러 개의 두꺼운 책들에는 실제 전쟁을 겪은 민간인 피해자들의 증언과 당시 그들이 목격했던 전쟁의 잔혹한 현실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으며, 관람객은 의자에 앉아 직접 책장을 넘겨 가며 증언을 읽을 수 있었다. 취재단 역시 오랜 시간 해당 공간에 머무르며 한국어로 번역된 증언들을 읽었다. 자식을 죽이고 따라 죽어야 했던 부모, 일본군에 의해 집단 자결을 강요받아 수류탄과 독극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민들, 눈앞에서 죽은 가족을 두고 살기 위해 떠나야 했던 이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민간인 중에는 다수의 한국인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기록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평화기념자료관은 인간성을 상실한 오키나와 전투의 공포를 낱낱이 드러내며,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으로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나아가 역사의 교훈과 평화의 중요성을 후세에 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광장 중앙의 ‘평화의 불꽃’ (사진=양라윤 기자.)
▲평화의 광장에 위치한 ‘평화의 비’ (사진=임지연 기자.)
▲‘평화의 비’ 앞에서 묵념하는 방문객의 모습 (사진=임지연 기자.)

관람을 마치고 전시장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평화기념공원이 자리한 마부니 언덕 일대의 바다 절벽은 전쟁 당시 도망치던 주민들이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장소로, 고요한 해안선 너머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화의 광장’에는 ‘평화의 초석’이 늘어서 있었고, 그 중앙에는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긴 ‘평화의 불꽃’이 빛나고 있었다. 방사형으로 펼쳐진 평화의 초석에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취재단은 일제강점기 당시 오키나와로 끌려와 이곳에서 억울하게 사망한 한국인들의 이름 앞에서 묵념했다. 평화의 광장 위령비에는 일본인과 미국인, 한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희생자들이 기록돼 있으며 현재까지도 희생자들의 이름이 추가 등재되고 있다. 병풍처럼 늘어선 평화의 초석에는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인 ‘철의 폭풍’이 평화의 물결이 돼 바다로 돌아가길 바란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슈리성, 류큐 왕국의 뿌리를 찾아서

취재단은 ‘류큐’의 흔적을 찾아 완만한 언덕 위에 위치한 붉은빛의 도성 ‘슈리성’으로 향했다. 류큐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 오키나와 곳곳에서 강력한 지배 세력이 등장하며 지어진 300여 개의 방어용 성채 ‘구스쿠’의 일종인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도성이 되며 대대적인 확장을 겪었다. 1429년 류큐 왕국 설립 이래 오키나와는 지속적인 외세의 침입을 겪어 왔다. 이와 함께 수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한 슈리성은 단순한 도성을 넘어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유적지다. 슈리성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 양식 등 높은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슈리에 위치한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정체성과 함께 오키나와 전투의 역사, 그리고 현재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슈리성 정문 ‘슈레이몬’ (사진=이하영 기자.)

언덕 위에서 취재단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슈리성의 정문 ‘슈레이몬’이었다. 이천 엔 지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붉은색의 슈레이몬은 중국풍 건축 양식의 특징을 띠고 있다. 주변 국가와의 활발한 교류로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류큐 왕국의 독특한 문화는 슈리성의 건축 양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붉은색과 금색이 많이 사용된 슈리성의 건물과 곳곳에 위치한 용 장식 등은 전형적인 중국풍이다. 슈레이몬을 통과해 세 개의 문을 더 지난 취재단은 입장권과 함께 정전 ‘세이덴’으로 향했다. 하지만 취재단 앞에 펼쳐진 풍경은 웅장한 세이덴이 아닌 세이덴을 둘러싼 대형 컨테이너 건물이었다.

▲공사 중인 세이덴을 둘러싼 컨테이너 (사진=양라윤 기자.)

류큐 왕국 멸망 이후 일본군 주둔지로 쓰이던 슈리성은 류큐 역사를 지우고 오키나와 주민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본 정부에 의해 철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극렬한 반대와 슈리성의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알아본 본토 출신의 교사 가마쿠라 요시타로의 노력으로 슈리성은 1925년 국보로 지정되며 그 역사를 이어왔다. 슈리성에서도 오키나와 전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슈리성 지하 벙커에 일본군 총사령부가 설치되며 슈리성 역시 전투에 휘말렸다. 핵심 타깃이 된 슈리성은 미군의 공격으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후 오키나와가 미국의 통치하에 놓이며 미군정은 슈레이몬 등 일부 문화유산을 복원했으나, 본격적인 성 복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슈리성 복원 논의는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1972년 이후부터 본격화됐다. 1986년 국영 공원 사업으로 슈리성이 지정되며 복원 설계가 시작됐고, 그로부터 3년 뒤 공사가 착수돼 오키나와 반환 20주년을 기념하는 1992년에 완공됐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슈리성 복원은 47년 만에 실현돼 2019년 전면 개원에 이르렀다.

▲2019년 화재 이전, 복원이 완료된 슈리성 정전 ‘세이덴’의 모습 (사진출처=Okinawa Churashima Foundation.)
▲슈리성의 역사 (일러스트=이하영 기자.)

그러나 복원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9년 10월, 슈리성은 또다시 소실의 아픔을 겪었다. 원인불명의 화재로 정전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이 불탔고, 슈리성의 공예품과 자료 1,510점이 손상을 입어 그중 391점이 전소됐다. 화재 직후 나하 시민을 중심으로 슈리성 복원을 위한 모금 운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돼, 목표액의 940%에 달하는 약 9억 4천만 엔이 모였다. 이는 슈리성을 향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깊은 애정을 보여 준다.

현재 역사적 고증에 따라 18세기 슈리성의 모습을 원형으로 진행 중인 복원에는 최신 기술들이 활용되고 있다.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슈리성 복원은 방문객들에게도 일부 공개되며 참여와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컨테이너 건물로 들어선 취재단은 복원이 한창인 세이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층으로 구성돼 복원 과정을 관람할 수 있는 견학 구역에는 복원 과정에 대한 안내자료와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지붕의 용 장식과 기와 등이 전시돼 있었다. 3층의 견학 구역에서는 지붕의 기와를 수리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견학 구역 안내도 (사진=이하영 기자.)
▲세이덴 복원 공사 현장 (사진=양라윤 기자.)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세이덴 지붕의 용 장식 (사진=양라윤 기자.)
▲견학 구역에 전시된 세이덴의 붉은 기와 (사진=양라윤 기자.)

슈리성의 복원은 단순한 건축물의 재건을 넘어, 오키나와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역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과정으로 평가된다. 2019년 화재로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이 소실됐지만 슈리성은 여전히 방문객들로 활기를 띠었다. 가족들과 슈리성에 방문한 일본인 히카리 씨는 “슈리성이 복원되는 모습을 직접 관람할 수 있어 뜻깊었다”며 “슈리성은 오키나와의 과거와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곳”이라 말했다.

▲슈리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나하 시내 (사진=이하영 기자.)

성곽을 따라 슈리성의 전망대에 오르자, 오키나와의 중심인 나하시와 국제 무역의 중심지인 나하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풍경에서 찬란했던 류큐 왕국의 역사와 숨결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상처를 넘어 미래의 평화로

오키나와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다양한 평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6월 23일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위령의 날’ 행사가 열린다. 이날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오키나와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결된 날로, 오키나와현이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오키나와현이 주최하는 공식적인 추모 행사 외에도 지역 곳곳의 전쟁 유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추도식이 열린다. 또한, 지역 사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전쟁 반대 운동을 펼치며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는 미래 세대인 학생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하기 위해 전쟁 생존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직접 들려주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전쟁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전쟁 유적지인 평화기념공원을 비롯해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같은 역사적인 장소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은 오키나와 전투 당시 희생된 수많은 10대 소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전쟁 생존자들의 상세한 증언 자료와 함께 전후 세대들이 제작한 체험적 전시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강 교수는 “오키나와인들은 평화 활동과 교육을 통해 그들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오키나와의 고유한 정체성이 더욱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평화기념공원 자료관 앞 관람객들이 남긴 평화의 메시지 (사진=양라윤 기자.)

오키나와의 정체성은 복합적인 층위를 지닌다. 류큐와 오키나와의 정체성이 융합돼 있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다양한 세대의 오키나와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13년 류우코쿠대학 마쓰시마 야스카쓰 교수는 류큐의 독립을 주장하는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를 발족했고, 여러 시민 네트워크에서 탈군사화, 탈식민지화, 류큐 민족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오키나와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나 오키나와는 여전히 그들의 뿌리를 기억하고 류큐 왕국의 정체성을 계승하기 위해 류큐어 교육 프로그램, 류큐 전통문화 축제 등을 이어가고 있다.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일본 본토와 다른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는 차별적인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으며, 미군기지 문제로 인한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쟁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푸른 바다와 자연을 간직한 아름다운 섬, 오키나와. 이곳의 아픈 역사는 멈춰 있는 역사책의 흑백 사진이 아닌 평화를 향해 움직이는 미래로서 다시 살아난다. 오키나와가 말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