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통이란 불빛으로 현대를 비추다, 백창호 동문
우리대학 미술학부 수업, 전통등 제작에 도움 돼 한국 전통등 문화 되살리고자 복원 시작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걸으며 진정한 자신을 찾길”
우리대학 미술학부 89학번 백창호 동문. 그는 등에 담긴 한국 민족의 세계관을 되살리고 수천 년간 지속된 전통등 역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등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가치를 보여 준 백 동문. 그는 전통등 복원이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라 믿는다. 세심한 손길로 전통의 가치를 조명하는 백창호 동문을 만났다.
Q. 안녕하세요, 백창호 한국전통등연구원 대표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동국대학교 미술학부 89학번 백창호입니다. 저는 30년간 전통등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등연구원 대표로서 등 복원 사업을 총괄 및 기획하고 있습니다.
Q. 우리대학 재학 시절 인상 깊었던 강의가 있나요?
A. 대학 시절 들었던 수업들은 창작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줬어요. 동국대학교 미술학부는 한국화, 서양화, 조소 그리고 불교미술까지 4개 전공으로 이뤄져 있는데, 저는 의외로 서양화를 전공했답니다. 현재 제 직업과 전공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진 않지만, ‘제작 기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서양화 수업은 물론 미술학부의 모든 전공 수업을 들었어요. 특히 불교미술 실습 수업에선 한지의 특성을 배웠는데, 이 경험이 틀에 한지를 붙여 만드는 전통등 제작 작업에 큰 도움이 됐죠.
Q. 대표님께서 전통등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등과의 인연은 30년 전 ‘등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시작됐어요. 조계종이 추진한 등 복원 사업의 결실인 전통등 재현전 개최를 위해 저를 포함한 동국대학교 졸업생 5~6명이 주축이 돼 ‘전통등연구회’를 결성했죠. 재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에도 등 복원 사업에 대한 저의 열정은 식지 않고 계속됐습니다. 전통등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연구회의 이름을 ‘한국전통등연구원’으로 개칭한 후 서울 세계 등축제부터 싱가포르와 대만의 등 축제에 참여하기까지 쉼 없이 달려왔죠. 현재는 축제와 전시를 기획하는 것을 넘어 전통등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교육 사업까지 폭넓게 진행하며 우리나라의 전통등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대표님께서 등을 복원하고자 결심한 순간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A. 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우리나라의 등 문화를 되찾고자 복원을 결심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흔히 등 행사를 불교문화로만 인식하지만, 역사적으로 전통등은 ‘대중문화’였습니다. 과거엔 집집마다 서민들의 소망과 염원이 담긴 등이 걸려 있었어요. 많은 이들이 향유하며 우리 고유의 문화로 발전했던 전통등이 지금은 단순히 종교 행사를 위한 장식품으로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를 바로잡고자 결심했죠. 처음엔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수입이 적었지만,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굳은 의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 전통등은 제 인생의 동반자가 됐어요.
Q. 전통등을 복원하시는 과정에서 어려운 순간이 있었나요?
A. 처음 전통등 복원을 결심했던 1990년대에는 황무지에서 길을 개척하듯 막막함뿐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라곤 40여 종의 문헌이 전부였으니까요. 그중에서도 과거의 잡지라고 할 수 있는 풍속지만이 전통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등 제작 방식조차 명확히 나와 있지 않아 역사적 고증이 매우 어려웠어요. 결국 문헌자료를 참고하기보다 당시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민속학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오로지 몸으로 부딪쳐야 했죠.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친구들과 후배들 덕분입니다. 대학 시절부터 전통등연구회를 결성하기까지 이들은 제게 원동력이 돼 주었어요. 물론 어려움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단 한 순간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잠을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스케치하며 전통등 복원에 몰두했죠. 전통등을 복원하는 일은 저에겐 숙명과도 마찬가지입니다.
Q. 전통등을 현대적인 콘텐츠로 재창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전통등에 현대인들의 인식 변화를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집 모양으로 등을 제작할 때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 모양으로 표현했어요. 기와집은 서민들의 염원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집 모양 등을 제작하기 위해선 기와집의 형태가 아닌 21세기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주거 공간의 모습으로 새롭게 묘사돼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전통등연구원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위해 전통등과 함께 로봇등, 캐릭터등도 제작하고 있습니다. 전래의 전통등을 현대적 감각에 맞춰 제작함으로써 사람들이 옛것에도 관심 갖기를 바라면서요. 이를 위해 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소망은 무엇일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Q. 새로운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작금의 시대에서 ‘전통’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A. 전통은 현재 생산되는 모든 콘텐츠의 ‘뿌리’입니다. 콘텐츠를 열매에 비유하자면, 전통을 잊은 현대의 콘텐츠는 뿌리 없는 열매와 같죠.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열광하는 게임 분야에도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가 있습니다. 그 스토리의 뿌리는 『삼국지』라는 역사와 문화인 것이죠. 이처럼 현대의 많은 콘텐츠가 역사를 소재로 한다는 것은 전통 없이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전통을 지켜 나가야 할 이유는 충분해요. 최근 ‘복고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을 보면, 전통문화는 현대의 밑거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쉼터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도 전통의 가치는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Q. 복원 기술의 전수자가 사라져 점점 잊혀 가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우려가 깊으실 것 같습니다. 전통을 계승하는 연구원으로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나요?
A. 사실 등 문화도 제가 복원하기 전까지는 그 역사적 흐름이 끊겨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 고유문화의 정체성이 약화되며,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등의 궤적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죠. 영원히 잊힐 뻔한 등 문화를 되살리는 복원 작업에는 우리 민족의 슬픔을 치유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희미해져 가던 문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자긍심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만약 누군가 예전의 전통등처럼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다시 복원하고자 한다면, 저는 기꺼이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남들은 무시하며 가지 않는 길이더라도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걷는 길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Q. 대표님께 ‘전통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전통등은 제 삶의 ‘희로애락’입니다. 복원에 매진하며 생계가 어려웠을 때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전통등이 가진 의미에 공감해 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자부심을 느끼고, 인생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기쁨을 느껴요. 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인 전통등을 선물함으로써 그들이 등을 통해 비로소 꿈을 이루길 바랍니다. 제가 제작하고자 하는 등은 단순한 조명 도구를 넘어 소원을 이뤄주는 상징적인 존재니까요. 저는 소망을 선물한다는 자부심과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를 전통등에 담아 이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Q. 대표님은 책 『연등문화의 역사』를 집필한 작가이시기도 합니다. 작중 “연등은 밤을 밝히는 도구를 뛰어넘어 우리 인류가 무엇을 도모해야만 하는지를 알려 준다”고 하셨는데요. 현대사회 인류가 도모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지금 우리가 꾀해야 하는 것은 바로 ‘공동체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일상은 공동체라는 개념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소원 따위는 공유되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죠. 이때 등 문화는 각자의 소망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는 문화를 이뤄낸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연대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점점 삭막해지고 서로를 비방하는 데 익숙해져 가는 지금, 전통등이 현대사회에 새로운 유대감을 부여하는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Q. 한국전통등연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A. 우리나라에 ‘등 마을’을 조성하고 싶습니다. 등 작가들이 모여 마치 테마파크와 같은 등 마을을 만드는 것이죠. 등불이 수놓인 공간에 방문해 가지각색의 등을 구경하는 시민들은 각자의 소망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등 문화를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등 마을이 축제나 전시와 같은 일회성 행사를 넘어,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Q. 전통등 명장, 한 기관의 대표가 아닌 ‘인간 백창호’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A. 사실 전통등을 빼고 저 자신을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생 전체가 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다만, 대학 시절부터 늘 예술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미처 배우지 못했던 표현 기법, 바빠서 도전하지 못했던 회화를 저는 여전히 꿈꿉니다. 우연히 시작한 전통등 복원 사업을 30년 동안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미술의 새로운 영역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꿈과는 별개로, 등과 함께하는 제 인생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Q. 불안정한 청춘 속에서 각자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대학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남들이 가는 길, 이미 그 끝이 보이는 길로만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과 같은 물질적 가치만 좇다 보면, 그 여정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어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면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당장 결과가 따르지 않더라도 끝끝내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은 힘들기 마련이지만, 어려움이 있어야 그 의미가 더욱 커지지 않을까요? 동국대학교 후배들이 앞으로 무엇이든 도전해 보길 응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될 거예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작게 타오르는 등불. 바람에 아무리 흔들려도 꿋꿋하게 주변을 밝히는 등은 아득했던 전통 복원의 길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백 동문과 닮았다. 사람들에게 잊혀 점점 흐릿해져 가던 전통등은 그를 만나 다시 환하게 빛나고 있다. 등불과 함께 백창호 동문의 앞날도 눈부시게 반짝이길 동대신문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