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재개봉에 부쳐 MZ세대 시네필들에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 Offret>(1986)이 1995년 한국 첫 개봉 이후 근 30년 만에 재개봉했다. 놀랄 일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첫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같이 간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며 봐야한다는 웃지 못할 말이 있었을 만큼, 엄청나게 지루한 영화다. 누군가에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전율이 일만큼 감동적일 수도 있겠지만 내겐 몇 번이고 다시 보기를 시도해도 같은 장면만 반복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영화다. 단,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주는 감동은 잊기 어렵다. 근데, 그게 타르코프스키의 영상이 주는 찬연함 때문인지 바흐의 음악이 품고 있는 위대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1995년 <희생>의 한국 첫 개봉 당시 단관 극장에서 1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세계 예술영화 상영역사에서도 일종의 신화로 남아 있다. 올해 출간된, 1990년대 한국의 시네필 붐을 다룬 한 영어권 서적은 이 ‘사건’을 한 장(章)으로 다루고 있을 정도다. 얼마 전 영화잡지 『씨네21』도 <희생> 재개봉을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30년 만에 재개봉한 <희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몇 년 사이 ‘MZ세대 시네필’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예술영화가 젊은층에게 많은 사랑을 받기는 했다. 코로나19 이후 상업영화 일색이던 극장가가 수급의 문제로 본의 아니게(?) 독립·예술영화를 많이 상영하기도 했고, OTT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독립·예술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폭도 꽤나 넓어졌다. GV나 굿즈가 주는 매력도 있을 것이다. 감독·평론가의 코멘트를 깃들인 감상이나 포스터 등 해당 영화와 관련한 상품은 뭔가 다른 경험을 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인스타그램에 인증 샷을 올리는 것도 MZ들에겐 필수다.
얼마 전 내가 가르치는 영화학과 대학원생들과 죽은 지 15년이 다 돼가는 에릭 로메르 감독이 왜 젊은 시네필들에게 인기 있는지 얘기하다가 함께 내린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지적인 대화 장면이 많아 지적 허영을 자극한다. ② 적지 않은 나이에 찍었음에도 연애를 포함한 청춘들의 내면 심리를 너무 잘 포착한다. ③ 이게 제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파스텔 톤의 이미지들이 너무 예뻐서 인스타에 올리기 좋다. 몇 년 전 그의 영화들 중 ‘희극과 격언’ 시리즈와 ‘사계절 이야기’ 시리즈가 모두 각본집으로 출간되고, 심지어 ‘여섯 개의 도 덕 이야기’ 시리즈의 초안이 된 단편소설집도 나왔는데, 표지가 정말 예뻐서 그의 팬이라면 소장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젊은 시네필들이 영화사 고전들의 ‘시네마틱한 순간’이나 그 영화의 정수를 무시한 채 그저 예쁜 이미지나 뭔가 다른 영화를 소비했다는 힙스터한 감성만을 중시한다고 푸념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시대와 세대는 각각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방식이 있다. 오히려 1990년대 과잉화한 시네필 시대에 영화를 숭배했던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책과 잡지를 통해 그 영화의 위대함을 배웠다. 보고 느낀 것이 아니라 그냥 배웠다. 그 배움은 나쁜 화질과 오역 자막으로 가득한 비디오를 통해 더 강화되고 교조화되었다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더 위대하게 느껴진 것?!). 내 세대에게 영화사의 고전은 그저 경배해 마지않을 정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오즈와 브레송에게서 그런 위대함을 느낀다. 펠리니와 타르코프스키에게선 아니다. 물론 그건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영화의 우열 문제를 취향의 문제로 돌리는 건 가장 비겁한 짓이다) 그 영화들의 심연이 나의 심장에 가닿지 못한 것 인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무지함 내지 무감동 탓일 게다.
<희생>의 재개봉이 MZ세대 시네필들에게 내 젊은 시절의 맹목적 신화와 교조를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메시지를 떠나 풍경화 같은 이 영화의 이미지에만 반했어도 그건 제대로 감상한 것이다. 나처럼 ‘마태 수난곡’에만 전율했어도 영화를 온전히 본 것이다. 미친 소리 같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고 나왔어도, 그것이야말로 타르코프스키가 의도한 것일지 모른다. 오랜만에 극장에 자러 갔다 올 일이 있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