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MZ세대’와 MZ세대가 나약하고 갈등이 많아 보이는 이유
‘MZ세대’에 대한 인식과 그 개념의 공(空)함
MZ세대가 괜스레 어렵고 힘든 일은 피하고, 연애 및 결혼을 기피함으로써 출산율을 낮추고 있으며, 여러 갈등을 야기하는 개인주의로 살아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고 호시절인 지금을 사는 게 MZ세대이기에 그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근거다. 이는 분명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조건하에서 틀린 말이 아니게 되는지 성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은 다 특정한 현상을 개념화하고 실체화하여 마치 그것이 진정 있는 것처럼 가정하고 전제하여 쌓아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처님이 설하신《금강경》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말한 바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말한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법을 말한다는 것은 법을 가히 말할 수 없는지라 이 이름이 법을 말함이니라.”(법륜스님,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 정토출판, 2012, p.374)
우리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고 여기며 사는데 기실 그러한 실체는 없고, 다만 그렇게 이름 지었기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위 말씀의 함의다. 위에서 언급한 MZ세대를 토대로 보자면, MZ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MZ세대’라고 이름 지었기 때문에 MZ세대인 것이다. 이러한 MZ세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MZ세대’가 그렇게 있다고 가정하고 전제하여 쌓아 올린 기반을 토대로 이야기하기에 MZ세대라는 실체가 있는 듯하고, 마치 있는 듯하기에 ‘이러하다 저러하다’라는 속성을 부여하게 된다.
‘MZ세대’가 실체적으로 있고 또한 속성이 그러그러하다면 MZ세대는 단군 이래 가장 유복한 환경에서도 만족하지 못하여 눈만 높고 어리석은 이들이 맞다. MZ세대라는 실체적 관념에 ‘유복한 환경’이라는 개념을 더하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우매함’이라는 개념을 추가로 더하여, 그 결과로 ‘나약하다’ 내지 ‘갈등을 유발한다’라는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MZ세대라는 개념을 구현할 수 있고, 또한 특정 속성을 덮어씌움으로써 철저히 단죄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진정 MZ세대는 존재하는가? 부처님은 심지어 당신께서 설하신 ‘법’조차 없다고 하셨다. 다만 그렇게 이름 지었기 때문에 법인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하신 부처님이 당신의 지혜를 거르고 걸러 설파하신,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으로 손꼽히는 《금강경》의 ‘법’도 단지 이름 지었기 때문에 법이지 실제로는 없을진데, 그로부터 2000년도 넘는 시간이 흘러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90, 00년대쯤에 태어난 이들을 이름 짓는 MZ세대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MZ세대’는 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MZ세대는 ‘공(空)’하다.”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제자인 수보리에게 가르치신 ‘즉비卽非, 시명是名’이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고정되어 실재한다고 잘못 인식하는,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현상을 실체가 아닌 말 그대로 ‘현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즉비卽非’요, 단지 이름 지었기에 그것이 실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게 ‘시명是名’이다. 우리는 속고 또 속는다.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한다. 그때 우리는 외쳐야 한다. “즉비卽非!”, “시명是名!”, “예끼, 물러가라!”
MZ세대가 나약해보이는 이유
하지만 MZ세대에 대한 인식은 분명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 그리고 이는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 속속들이 스며있다. 그렇다면 십분 양보하여 이러한 인식이 진실에 썩 부합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MZ세대가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는 ‘성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끈기 있게 살아가는 힘이 부족한, 즉 현실보다는 이상과 망념에 갇혀 살아가는 영혼 및 정신적 방황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름의 추론이 있다.
부처님이 살아계셨던 기원전 5세기에도 논쟁과 시비가 가득하여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러한 말장난에 제자들이 휘둘리지 않도록 한마디 한마디 심혈을 기울이며 말씀을 전하셨다. 언어 및 개념이라는 것에 빠져들어 그것을 실체화하지 않도록 심사숙고하고 노심초사하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부처님의 제자라는 분들조차 기원전 5세기라는, 지금보다는 언어와 개념이 덜 난무한 시절에도 부지불식간에 길을 잃고 마음에 번뇌가 차올라 괴로움을 겪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수많은 개념화 및 실체화로 그득그득한 세상에서 많이들 헤매며 살고 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미디어에 다각적으로 노출된 MZ세대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가상세계가 이미 오래전부터 현실처럼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그것은 유아기 때부터 시청한 만화에서 비롯될 것이다. 만화 속 세상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피부에 티끌 하나 없고, 아름다운 우정으로 서로 북돋우며, 악당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정의감으로 세상을 멸망이라는 위험으로부터 구해낸다. 이는 나이가 들면서 각종 매체로 진화하고 그러한 세상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보잘것없는 현실과는 다른,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이 된다. 이미 정신은 이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현실에서 ‘현실’을 살아내라고 하면 어찌 현실을 살아낼 수 있을까?
MZ세대가 갈등이 많아 보이는 이유
제목에서 또한 언급한 ‘MZ세대가 갈등이 많아 보이는 이유’ 역시, 원인은 마찬가지로 ‘개념화’이다. 무지개를 보면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색깔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본디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인 《기상학(Meteorologica)》에서 적색, 녹색, 보라색의 3가지 색으로 무지개를 보았다. 뉴턴 이전의 유럽에서는 무지개를 주황색과 남색을 제외한 5가지 색으로 분류하곤 했다. 1665년경 뉴턴이 프리즘을 통해 가시광선의 스펙트럼을 연구한 후에서야 무지개를 7가지 색으로 식별하게 되었고, 대중적으로 일반화됐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 무지개’로 인식하고 있다.
사실 무지개의 색을 어떻게 나누는지를 넘어서, 애초에 무지개색을 나눌 수 있는가부터 성찰해보아야 한다. 무지개는 그냥 무지개 아닌가? 색이라는 개념을 통해 억지로 나누는 것일지 모른다. 더불어 더 진한 색과 더 연한 색이 무지개 내에 혼재해있다. 어느 경계부터 둘을 나눌 수 있는지 불명확함에도 굳이 나누곤 한다. 그 외에 사람이 보지 못하는 다른 색도 있다면? 이러함에도 우리는 그저 존재하는 현상을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개념화하여 분명히 하려는 정신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고를 질식시킨다. 나라는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사태를 이러이러하게 이해하는데,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저러저러하게 이해하고 있다. 둘이 집중하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남녀, 정치적 견해, 계층, 지역, 세대 등 여러 부문에서의 갈등을 이끄는데, 그 원인은 무지개와 같이 나눌 수 없는 것을 굳이 나누려고 하는 경향에 기반한다. 그저 존재하는 현상을 특정 개념에 따라 분절하여 이해하기에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이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자크 데리다 등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및 《시뮬라시옹》을 저술한 장 보드리야르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우리네 정신작용(내지 우매함)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이 진정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인지, 자꾸만 빠지는 사고의 함정에서 왜 헤어나와야 하는지를 통찰한다. 그것이 가지는 삶에 대한 왜곡과 오류를 경계해야 함을 일러준다. 즉, 우리는 자꾸만 현상을 구분 짓고 이름 지어 개념화 및 실체화하는, 저항하기 어려운 습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만이 삶을 삶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타인을 타인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특정 관념에 이들을 가둬두지 않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