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일본, 여전히 먼나라 이웃나라

2024-06-02     박인휘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박인휘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처음 출판된 게 1982년, 필자가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다. 한국 최고의 지성(知性)께서 쓰신 책을 사춘기 학생이 이해할 턱이 없었지만, 6개의 주제에 걸쳐 일본 사회의 특징을 상세하게 설명하신 선생님의 풍부한 지식과 관점에 감탄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니(SONY)에서 만든 미니 카세트가 최고의 소장품이었던 시절이 기억에 선명한 필자에게, 내년으로 다가온 한일 수교 60년은 남다른 감회를 가지게 만든다.   

  최근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 관계자와 학자들이 중요한 모임을 가졌다고 하는데, 한일 수교 60년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 의미를 현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미리미리 하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대표적인 아이디어들은 한일 간 출입국 절차 간소화, 대학생 교류 활성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버전 2.0’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출입국 절차 간소화는 유럽의 ‘생겐조약’을 또 대학생 교류는 역시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오랜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근대 국가의 출현은 유럽이 훨씬 먼저였으니, 국가들 간 관계 개선 사업 아이디어를 유럽에서 찾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후쿠오카를 다녀오지 않은 한국 대학생을 찾는 게 더 쉬울 거라는 농담이 있듯이, 후쿠오카 시내의 캐널시티 쇼핑몰과 나카스강 포장마차 거리에서는 여기저기서 한국말을 들을 수가 있다. 실제로 필자는 작년 11월 초 후쿠오카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포장마차 거리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동석을 하기도 했으니, 한국과 일본이 경험하고 있는 일상적 친근감은 가히 역대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한일 사이에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정치학의 신자유주의 이론에는 ‘전환효과’라는 게 있는데, 사회경제 영역에서 서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맺은 국가들은 일정한 시간과 과정을 거쳐서 정치군사 영역에서도 서로 신뢰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이 두 개 서로 다른 영역 사이의 거리감 해소가 바로 ‘전환효과’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경제 관계를 맺어오고 있으며, 후쿠오카 관광 사례에서 보듯이 사회문화적으로 왕성한 상호 방문과 교류는 국제사회의 다른 어떤 이웃한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국가 사이에 정치적으로 가깝고 안보적으로 서로 신뢰하는 ‘전환효과’는 전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문제가 있을 때 남 탓을 하면, 자기 발전에 한계가 있고 또 근본적인 해결도 불가능하니, 일단 우리의 책임과 문제를 들여다 보도록 노력하자. 동시에 일본을 향해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잘못된 점과 책임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무라야먀 총리(1995년)와 오부찌 총리(1998년)의 사과(謝過)가 충분했느냐 아니냐, 또 하토야마 총리가 서대문형무소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장면(2015년)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마음을 열어야 하느냐 등의 문제는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일 모두 오랫동안 지고 가야 할 숙제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 국교정상화를 밀어부친 데에는 복잡한 배경이 있었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실용주의 외교’였다. 논쟁적 소지가 있지만, 그 후 한국은 짧은 시간에 세계가 주목하는 중화학 공업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당시의 ‘실용주의’ 정신 그리고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역사정신’, 이 둘 사이의 균형만이 한국과 일본 모두가 승리하는 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