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해외취재] 여유가 흐르는 나라, 스페인을 담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스페인의 낮잠 문화, ‘시에스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현재의 소중함을 원동력으로 한국인, 이민 희망 이유 1위 ‘삶의 여유 부족

2024-06-02     임재경 기자
▲스페인 광장에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사진=임재경 기자.)

“¡Hola!” 느긋하고도 명쾌한 인사가 거리 곳곳에서 울리는 이곳은 ‘빨리빨리’ 한국에서 약 10,000km 떨어진 스페인이다. 비행기로 14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두 나라를 구분 짓는 기준은 지리적 특성과 더불어 ‘여유를 즐기는 태도’에 있다. 시에스타(siesta, 낮잠 문화)의 나라로 불리는 스페인의 사람들이 일상 속 여유를 바라보고 즐기는 방식은 무엇일까. 취재단은 그들의 여유로운 문화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한국의 여유 부족이 불러오는 문제를 살피고자 스페인의 대표 도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시에스타’, 과거 아닌 현재진행형

‘시에스타’는 일출 무렵부터 정오까지 6시간이 지나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라틴어 ‘hora sexra’에서 유래된 스페인어로, 스페인의 전통적 낮잠 풍습을 의미한다. 스페인은 일의 능률을 올리고자 하루 중 기온이 높은 오후 1시경부터 약 3시간 정도 시에스타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퇴근 시간과 저녁 식사 시간을 늦춤과 동시에 수면시간이 적어지는 문제를 불러와 한동안 ‘시에스타 폐지’가 논의됐다.

                              ▲오후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패스트푸드점 (사진=임재경 기자.)

그럼에도 여전히 시에스타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실제로 취재단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여러 가게들이 시에스타 시간 동안에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취재단이 마드리드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묵었던 숙소와 가까운 콰트로 카미노스(Cuatro Caminos)역 주변 거리는 오후 6시를 기준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비교적 느긋하게 문을 열고서도 오후 2시까지 영업 후 문을 닫거나, 1시간 영업 후 시에스타 시간을 보내고 여섯 시부터 영업을 다시 시작하는 가게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또 한국이라면 이미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었을 시간인 오전 11시에 문을 연 가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오후가 돼서야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에서 만난 스페인 시민 루카스(가명) 씨는 “시에스타는 내게 필수적인 문화”라며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여름철이면 가장 더운 시간대에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시에스타는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만난 콜롬비아 출신 유학생 바올라 씨는 “도심이 아닌 교외 지역에서는 시에스타 시간에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여전히 문화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며 시에스타는 유지되고 있음을 전했다. 이어 “시에스타로 인해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많은 가게가 영업을 쉬는 것은 유학을 시작했던 시기에 꽤 놀라웠던 일”이라며 시에스타가 주는 신선함을 밝혔다.

“스페인은 지금을 즐길 수 있는 나라죠”

                                   ▲UAB 대학에 파견된 진영빈 학우 (사진=임재경 기자.)

스페인의 여유 중시 문화는 시에스타 외에 그들의 일상을 통해서도 체감할 수 있다. 우리대학 교환학생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UAB 대학(Universitat Autònoma de Barcelona)에 파견된 진영빈(경찰행정 21) 학우는 “스페인에서의 생활을 통해 ‘지금’이 주는 소중함을 깨달았다”며 직접 느낀 스페인 문화를 소개했다. 진 학우의 눈에 비친 스페인 문화의 특징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여유를 잃는 것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로, 이는 특히 학생들의 수업 태도에서 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스페인 학생들은 수업 중 손을 들어 교수에게 직접 질문하거나, 3시간 15분 동안의 긴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수업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수업에 열정적”이라며 한국과의 수업 태도 차이를 전했다. 진 학우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차이는 ‘현재의 중요성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학 진학을 한국에서는 취업 준비 등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써, 스페인에서는 관심 있는 분야의 학문을 더 배우기 위한 곳으로써 보는 듯하다”는 그의 설명은 스페인 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지금의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재 중시 태도가 만들어 낸 ‘지금을 즐기자’는 식의 분위기는 취업을 통한 경제적 독립 등 미래를 중시했던 진 학우의 가치관을 바꿨다. 그는 “이전에는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 활동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아닐지 고민했지만,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통해 매순간 적극적으로 임하면 얻어지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가 또 다른 원동력이 됐음을 밝혔다. 더불어 “덕분에 지금의 감정이나 상황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 행복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마드리드에서 카페 운영 중인 홍성하 씨 (사진=임재경 기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한국식 카페를 운영 중인 홍성하 씨와의 인터뷰에서도 현재 중시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홍성하 씨는 “금요일이면 반차를 사용하지 않고도 오후 2시에 퇴근하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며 스페인의 근로 환경을 놀라워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IT 기업에서 근무하며 아침 8시 반에 출근해 다음 날 자정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은 주 40시간 초과 근무 금지 기준과 약 2주간의 연말 휴가 등의 근로 환경을 준수한다. 이어 그는 “스페인에 와서 돈을 버는 것보다는 나만의 시간과 여유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스페인 문화를 통한 가치관의 변화를 전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현재 중시와 더불어, 두 사람의 답변에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한 ‘타인과의 비교로부터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패션 문화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 진 학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체형을 떠나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며 여러 스타일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며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표현에 적극적인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과 그 영향력을 전했다. 홍성화 씨 역시도 “카페 직원이 노출이 많은 복장으로 출근하더라도 그의 복장을 함부로 제한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며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더불어 “나는 나대로 아름답기 때문에 타인과의 비교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다양한 자기표현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고 그 이유를 짐작하기도 했다.

            ▲성소수자 연인이 표현된 보행 신호등 (사진=임재경 기자.)

실제로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 결과에 따르면, 스페인은 경제적·물리적 안전을 중시하는 ‘생존적 가치 중시 문화권’보다 신뢰와 관용 수준이 높은 ‘자기표현적 가치 중시 문화권’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즉 두 사람이 느낀 ‘패션의 자유’도 자기표현 중시 문화에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기표현적 가치 중시 문화권의 특징 중 하나인 높은 관용은 스페인의 거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관용은 보행 신호등 안 픽토그램에 성소수자 연인이 표현돼 있거나, 성소수자 연인끼리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등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홍성하 씨도 “가게에서 아이가 시끄럽게 굴어도 원래 아이는 그런 존재라는 듯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등 한국의 ‘노키즈존’과는 비교되는 부분이 많다”며 스페인의 높은 관용에 공감했다.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스페인과 달리, ‘빨리빨리’와 경쟁사회로 대변되는 한국에서는 여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2020년 사람인이 성인 남녀 4,229명을 대상으로 ‘해외 이민’에 관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이민 가고 싶다고 응답한 이들(60.2%) 중 43.4%가 ‘삶의 여유가 없음’을 이유로 꼽으며 여유 부족은 이민 희망의 가장 큰 이유로 드러났다. 2016년 성인 남녀 1,655명을 대상으로 한 같은 설문에서도 이민 의향을 밝힌 응답자(78.6%)에게 그 이유를 묻자 ‘삶의 여유가 필요해서’(56.4%)가 첫 번째 이유로 집계됐다. 4년이 지났음에도 많은 이들이 삶의 여유 부족이라는 같은 이유로 이민을 희망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여유 부족은 신체적·정신적 여유를 잃은 ‘번아웃 증후군’ 경험자 증가로 이어졌다. 지난해 2월 ‘WEEKLY BIZ’와 ‘포티파이’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55.1%가 번아웃 상태를 진단받았다. 10년 전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 당시에도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직장인이 85%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여유 부족에서 이어진 번아웃 증후군은 고질적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12월에 일상적 마음 돌봄 체계 구축과 정신건강 정책 정비 등을 목표로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현 정부 임기 내에 국민 100만 명의 심리 상담을 지원하고, 청년층을 대상으로 2년마다 정신건강 검진을 실시하겠다는 이 정책이 한국의 여유 부족에서 비롯된 정신질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페이스를 가지고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려가는 이들의 나라, 스페인. 그들에게 여유란 마라톤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추진력이자, 뛰어가며 마주치는 행복들을 영원으로 남겨 주는 사진기다. 앞이 아닌 옆을 바라봐도,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아도 우리의 달리기는 계속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듯한 스페인의 문화를 위로 삼아 속도에 매몰돼 지나쳤던 풍경들을 돌아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