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칼럼] 발길이 닿는 곳에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부처님을 말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국토에 조성된 마애불은 약 280여 건에 달한다. 2000년에 가까운 우리 불교의 역사 속에서 가늠해 보면 그 수는 많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마애불을 조성하는데 드는 공력을 생각한다면 꽤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마애불 중 70% 정도는 산 정상이나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단한 바위 속의 부처님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마애불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동력은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과 강렬한 염원에서 발현되었을 것이다.
마애불을 조성하는 일이 어려웠던 만큼, 이를 만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에는 늘 가쁜 숨을 내쉬게 된다.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길마저 행복했겠지만, 일종의 의무감을 지니고 그 길을 찾던 내게는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마애불을 찾아 산을 오를 때면 ‘왜 이리 높은 곳에, 험한 곳에 부처님을 새겨 이 고생인가’ 하며 선조들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 원망이 체념이 될 즈음 저 멀리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보이면, 그때부터는 어디에선가 다시 힘이 솟아 나는 듯 오른다. 그리고 그 앞에 서면, 왜 여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마애불의 시선은 언제나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는 곳에 닿아 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마애불을 조각한 사람들에게도, 힘든 길을 마다치 않고 마애불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그 동력은 깊은 신앙심과 간절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발걸음 끝에 마애불을 마주한 사람들은 마애불을 바라보고 또 그 시선을 따라 돌아보며, 산 위의 부처님이 항상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결국 마애불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살고자 염원한 사람들이, 사람을 위해 만든 신앙심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마애불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에 있다. 다만 어떤 마애불은 산꼭대기에, 어떤 마애불은 산속에, 어떤 마애불은 길가에 있을 뿐이다.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굳이 험한 산속의 바위를 골라 마애불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결국 사람들이 오가는 길과 연결된다. ‘제비원 석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나,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과 같이 많은 이들이 오가는 길목에 조성된 마애불은 긴 여정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좌상과 같이 뱃길을 바라보고 있는 마애불은 물 위에서의 긴 여정에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월출산 구정봉에 새겨진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은 깊고 험한 월출산을 넘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는 곳이다. 그곳이 최종 목적지이든, 산을 넘어가기 위한 경유지이든 간에, 마애불이 있는 곳은 무거운 발걸음을 쉬고, 어깨의 짐을 잠시 내려놓은 채 부처님과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안식의 공간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항상 발걸음 끝에 마애불이 있었다. 돌아보니 그 앞이었던 것 같다. 다른 길로 갈까 고민할 때도, 연구 주제를 정할 때도, 결국은 마애불을 선택했다. 아마도 나의 발걸음은 계속 마애불을 향해 갈 것만 같다. 길을 걷는 목적이 옛사람들과 같지는 않지만, 나 역시 마애불의 본질을 찾아가는 긴 여정 속에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산속의 마애불을 찾아갈 일을 생각하면 고생길이 떠올라 아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마애불이 지금의 나에게도 위안과 쉼을, 그리고 지식의 동력을 주는 것을. 이것이 그 옛날 험난한 곳에 마애불을 만든 사람들의 ‘빅픽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