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서평] 그래서 우리는 자란다

― 남지은,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2024-05-12     최의진 문학평론가
△ 사진= 교보문고

  틸란드시아 이오난사는 흙이 없어도 공기 중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며 자란다. 뿌리내릴 흙 한 줌 없는 텅 빈 허공에서도 죽지 않고 자라서 꽃을 피운다. 남지은의 첫 시집 『그림 없는 그림책』은 사람도 그렇다고 말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애써 모았던 흙 한 줌마저 빼앗긴 지금의 상처가 자신이 가진 전부인 듯해도, 분명 자란다고. “그림을 망치고 우는 아이” 같은 누군가가 눈물을 그치기까지 “세상 모든 그림책을 읽어”* 주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물론 현실은 행복과 환상으로 지어진 온실이 아니다. 단단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의 믿음도 막연한 낙관이 아닌 명확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시집 곳곳에는 생장점을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널려 있다. 작은 토끼가 “활활 타오르는 집을/깊은 눈동자에 밤새도록 담으”며 “숨죽이고”(「비상계단」) 지나야 하는 밤이 있다. “질문 금지/말대꾸 금지”와 같은 “긁힌 흔적”(「유리 그리기」)이 쓰리다. “가족들 발톱을/뽑아내는”(「넝쿨장미」) 취한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아버지를 죽여도 아버지가 많다”(「목마」).

  그러나, 화자가 공중전화를 붙들고 “엄마 좀 숨겨”달라고 애원해야 했던 유년을 회상하는 목소리에 「도움닫기」라는 제목이 붙는다. 상처를 도움닫기로 부를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상처를 직면하는 일이 성장의 시작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생장점이 망가진 사람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 그 의문 틈에서 우리는 “검고 미끌한 손끝을 갈고 또 갈”아둔 손을 맞잡게 된다. 지금 상처투성이든, 혹은 이미 웃자라버렸든, “어서 오렴/어린 사람”(「귀신의 집」).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미는 시인은 상처투성이가 된 어린 사람이 자라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기대했던 곳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리집에 와 밥해줄게”(「크로키」)라고 말하는 친구처럼, 불현듯 그를 방문하는 다정한 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남지은의 시는 제대로 자라야 한다며 함부로 채근하는 법 없이, 시집을 펼친 우리를 조심스레 보살핀다. 어디에나 있는 계단에서 구른 채 운다면 “이마를 닦”아내며 “내일은 괜찮을”(「고양이 보호자」) 것이라 속삭이고, 캄캄한 밤에 떨고 있다면 “달이 예쁘니 창을 열어두라” 일러준다. “달이 너만치 곱다”(「복기」)며 나보다도 먼저 나를 아껴준다.

  시집을 데우는 이 보살핌은 어떤 일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딱 하나의 조건만 존재한다. 계속해서 살아갈 것. 살아만 간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꼭 내 몫처럼 마련된 사랑이 온다는 말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시인은 문장으로 미리 그 사랑을 맛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란다. 상처투성이를 조심스레 기르는 손길처럼, “너를 망치고 싶지 않”(「헹가래, 헹가래」)다는 조심스러운 소원을 갖게 된다. 이제 막 세상을 만나는 아기에게 “좋은 이모가 되”(「잊었던 용기」)어주는 일이 책임이 아닌 바람이 된다.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묵직한 약속을 작은 새끼손가락에 담을 만큼, 우리는 튼튼해진다. “난간에 기대어 자라던 식물들이 난간을 벗어”(「테라스」)나는 것처럼.

 


* 남지은, 「잊었던 용기」, 『그림 없는 그림책』, 문학동네, 2024, 77~78쪽. 이후 같은 시집에서 인용할 경우, 시 제목만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