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고려시대 불교공예품의 조성방식, 연화(緣化)와 희사(喜捨)
1223년 고려의 죽주(竹州, 현재의 경기도 안성)에 있는 대혜원(大惠院)에서는 현감(賢堪) 스님과 대혜원의 원주(院主) 지성(智成), 남일월사(南日月寺)의 스님들과 전 상호장(上戶長)과 은퇴한 호장(戶長)들이 후원하여 범종을 만들었다.(도 1) 이들은 국왕의 만수무강과 국토의 태평과 법계(法界)의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모두 보리(菩提)를 득하기를 기원하며 범종을 만들었다.
1250년에 청주 백운사에는 사찰의 공양 시간을 알릴 때 사용하는 반자 1구가 봉안되었는데, 이 반자는 안일(安逸) 호장과 정위(正位) 한연유(韓衍愈)가 돌아가신 부모와 죽은 처의 극락왕생 및 발원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만든 것이다.(도 2)
<대혜원명 범종>과 <백운사명 반자>는 조성 방식이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1223년 조성한 죽주의 <대혜원명 범종>은 불사를 위해 대혜원의 스님을 비롯해 지방 호장이 참여하여 범종을 조성한 예이고, 1250년의 <백운사명 반자>는 안일 호장과 정위 한연유가 개인의 재산으로 반자를 만들어 사찰에 봉안한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불교공예품의 조성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연화(緣化)에 의한 것이고, 두 번째는 희사(喜捨)에 의한 것이다. 연화는 사찰에서 불사(佛事)를 할 때 재원 마련을 위해 스님들이 세속사회를 돌아다니면서 재정적 요청을 하여 불사를 완수하는 것으로 연화의 방식은 고려시대의 불교공예품을 조성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희사는 개인 발원자가 자신의 재원으로 불사를 완료한 뒤 사찰에 기부하는 것이다. 연화에 의한 불교공예품의 조성은 사찰의 불사라는 목적이 있지만, 희사는 개인적인 목적이 있어 불교공예품 조성 단계부터 차이가 난다. 즉, 연화가 공적인 목적이 있다면, 희사는 사적인 목적이 있다.
고려시대 연화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불사에는 사찰의 조성과 사찰 내 건물 조성, 불상이나 탑, 범종의 조성, 대장경이나 불구(佛具)의 조성, 사경이나 불화의 조성, 법회(法會)의 비용 마련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공예품 중에는 제작 시기와 봉안 사찰, 시주자와 장인(匠人) 등의 명문이 새겨진 예가 많고, 명문의 내용을 통해 연화에 의한 것인지 희사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연화와 희사에 의해 조성된 불교공예품으로는 범종과 쇠북, 향완 등이 있는데, 연화에 의한 조성과 희사에 의한 조성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전라남도 여천시 쌍봉면에서 발견된 <태안2년 장생사명 범종>은 태안 2년인 1086년 장생사의 사주(寺主)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4명의 스님과 함께 조성한 것이다. 명문에는 범종의 조성 목적이 ‘성수천장(聖壽天長)’이라고 새겨져 있어 장생사의 범종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도 3)
충청북도 제천시 남천동에서 발견된 <을사명 범종>은 입상화문(立狀花文)이 띠를 이루며 표현된 고려후기의 종으로 명문에는 범종을 조성한 목적이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을사년에 지유(智儒) 스님이 동량이 되어 “聖壽天長 國大民安 法界衆生 離苦得樂”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다.(도 4)
즉 범종의 조성 목적이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 및 법계(法界) 중생이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기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종의 조성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 상장군(上將軍) 조(曺)와 그의 처 하원군부인(河源郡夫人) 및 별장동정(別將同正) 한정(韓正)이 참여하였는데, 발원자인 조는 고려의 종2품과 정3품의 관직을 한 고위관료이고, 한정은 고려시대 정7품의 무관직 하위관료로 조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을사명 범종>의 조성에는 지유 스님을 포함해 고려의 고위관료와 그의 부인 및 하위관료가 연화활동으로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연화에 의해 조성된 고려시대 불교공예품 중에는 불구(佛具)의 도난 때문에 연화활동을 통해 조성된 예가 있어 주목된다.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에서 발견된 <선의림사명 금고>는 명문에 따르면, 무신년에 선의림사에 도둑이 들어 금고를 훔쳐가자 관심(冠心), 법명(法明), 선의림사 주지 유중(惟中) 스님을 중심으로 부호장 류장보(劉張輔)가 도난 2년 후인 1190년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도 5) 이 금고는 사찰의 금고가 도난에 의한 새로운 불사의 형태로 조성된 것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왜구에 의한 도난으로 조성된 금고도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은사지에서 발견된 <지정11년 감은사명 금고>는 명문에 따르면, 지정 11년인 1351년 왜구가 침입하여 반자와 종, 금구를 훔쳐가자 새로 조성한 것이다.(도 6) 이 금고는 고려후기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반자와 금구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존하는 가장 늦은 고려시대의 기년명 금고로도 중요하다.
한편 연화 활동에 의해 조성된 고려시대 불교공예품 중 청동은입사향완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도 있다. <지정4년 중흥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14세기 전반의 문양적 특징을 지닌 청동은입사향완으로 명문에 따르면, 지정 4년인 1344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 대전(大殿)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도 7) 이 청동은입사향완은 오여(悟如), 진오(眞悟), 계호(戒瑚) 스님과 첨의정승(僉議政承) 채하중(蔡河中, ?~1357)과 그의 부인 오산군(午山郡) 양씨(梁氏)가 연화 활동으로 함께 조성한 것이다. 명문의 발원 내용을 보면, 황제의 만수무강과 국왕의 장수, 천하태평이라는 발원과 함께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미치어 모두 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원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삼각산 중흥사는 고려시대 중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후기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태고 보우 스님은 지정 원년(1340) 채하중과 김문귀(金文貴)의 청으로 중흥사에 주석하면서 중수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고려하면, <지정4년 중흥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태고 보우가 중흥사 태고암에 주석하던 시점에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 향완이 제작되었던 1344년은 충목왕이 즉위하던 해로 <지정4년 중흥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충목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연화에 의해 조성된 불교공예품인 범종과 반자를 포함한 금고, 청동은입사향완 등은 불사라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조성되었다. 조성의 목적은 스님들과 후원자들의 발원이 포함된 것을 비롯해 도난에 의해 새롭게 조성된 것, 그리고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예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희사에 의해 조성된 불교공예품은 향완과 범종, 금고 등이 있는데, 청동은입사향완이 가장 많은 편이고, 범종과 금고는 적은 편이다. 희사에 의해 조성되는 불교공예품은 스님의 법명이 등장하지 않고 희사자들의 개인적인 발원과 희사자들의 이름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함평궁주방명 청동은입사향완>은 고려시대 왕비가 희사한 예로 명문에 따르면, 이 향완은 함평궁주방에서 화엄경장(華嚴經藏)에 놓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도 8) 함평궁주는 고려의 21대왕 희종(1204-1211)의 비인 함평왕후(成平王后)로 희종 7년(1211)에 정식 왕비로 책봉되어 함평궁주로 봉해졌고, 1247년에 사망했다. 고려시대의 궁방은 일정한 토지와 별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불교공예품을 조성하여 희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희사에 의해 조성된 고려시대 불교공예품 중에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성된 예도 있다. <기축년명 청동은입사향완>은 몸체에 용과 봉황이 은입사로 표현된 유일한 향완으로 받침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도 9) 명문에 따르면, 이 향완은 흥왕사(興王寺)에 봉안하기 위해 진례군(進禮郡, 현재의 금산)의 부호장 김부(金孚) 등이 발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개경의 장인 김언수(金彦守)가 제작한 것이다. 명문의 흥왕사는 고려 문종의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지방의 부호장이 왕실의 진전사원에 향완을 희사한 예는 이 향완에서만 볼 수 있는데, 진례군의 부호장 김부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바탕으로 최고의 기량을 지닌 개경의 장인을 동원해 청동은입사향완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을축년 보암사명 범종>은 을축년에 평장사(平章事) 기(奇)가 가재(家財)를 바쳐 종을 만들어 보암사에 희사한 것이다.(도 10) 명문에 따르면, 평장사 기는 돌아가신 부모와 죽은 아들 기복(奇福)의 명복을 빌고 법계의 생명들이 극락에 오르고 부부의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후세가 보리를 깨우치기를 발원하며 조성한 것이다. <을축년 보암사명 범종>은 돌아가신 부모와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고 발원자 부부의 복과 장수, 후세들의 보리증득을 위한 것으로 평장사 기씨 일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공예품의 조성은 승려들의 연화활동에 의해 조성된 것과 발원자들이 개인의 재산을 들여 조성한 희사의 방식이 있다. 두 가지 방식 중 연화에 의해 조성된 것이 희사에 의해 조성된 것보다 많으며, 이것은 고려시대 불교공예품 조성의 주축이 연화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화에 의한 불교공예품의 조성은 사찰의 불사 등 공적인 목적이 있는 반면 희사에 의한 조성은 발원자들의 개인적인 사적인 목적이 있으며, 이것은 명문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연화에 의한 조성은 승려만의 연화와 승려와 후원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있으며, 후원자들은 고위관료와 하급관료, 지방의 향리층과 여성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희사에 의한 조성도 고위관료와 하급관료, 지방의 향리층이 참여하였는데, 희사에 의한 조성의 경우 희사자의 경제적인 능력이 중요한 척도가 되며, 이것에 따라 조성되는 불교공예품의 수준도 달라진다. 연화와 희사에 의해 조성되는 불교공예품은 양식적으로도 차이를 보이는데, 연화에 의한 경우 제작 당시의 경향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희사에 의한 경우 향완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희사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틀에서 벗어난 다양한 문양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