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이탈하면서 걷기

2023-11-12     양지원 편집위원
△ 사진= 양지원 편집위원

  그날도 무리하게 걸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걷기에 대해 곱씹게 됐던 곳은 방콕의 Hua Lamphong(หัวลำโพง)역에서 구석진 카페를 찾아갈 무렵이었다. 더위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20분 거리는 한국에서의 20분과 다른 차원이었다. 그래서인지 태국에는 지하철이나 지상철 노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해 있었다. 오토바이 택시나 썽태우, 툭툭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편의를 모두 등진 채, 뙤약볕 아래의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나온 마음의 번잡함도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걷기를 찬미한 사람들은 많다. 멀게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칸트, 루소 등이 있지만 가깝게 사회학자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에서 걷기에 관한 다양한 용어와 정의를 소개한다. 지루하고 정적인 느낌이 드는 이 걷기가(파이팅 넘치고 트렌디해 보이는 크로스핏이나 하루키의 러닝도 아닌) 현대사회에서 크게 기능하는 이유는 “도착의 지연”과 “동일한 위상으로 움직임” 때문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 두 가지는 낯선 곳에서 크게 느껴진다. 탈 것으로의 이동은 수많은 풍경을 그저 쉽게 스쳐 지나가게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짧은 토막의 릴스를 빠르게 스와이프하는 것과 닮아 있다. 그렇지만 도로 옆에 붙어 있는 인도 위를 걷고, 골목 사이를 배회하는 것은 그 장소와 현장에 오롯이 포함되는 경험으로,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가 된다. 이때의 걷기는 현재 같은 장소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측면을 목격하게 한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어떤 곳에 시장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걷게 되면 시장 사람들이 팔고 있는 물건부터 그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손톱 끝까지 면밀한 삶의 구석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 행위는 이제 적극적인 행위의 읽기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거리를 걷다보면 당연히 이동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예상된 도착 시간보다 훨씬 늦어진다. 

  도착의 지연은 현재의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이때 걷기의 과정은 풍경으로의 일시적인 포섭과 이탈의 반복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현장에서 생활의 모습을 발견하는 행위는 현장성 자체를 일시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인간이 현장에서 걷는 속도로  천천히 빠져나올 때, 순식간에 그 광경에서 이탈한다. 이런 포섭과 이탈의 반복은 인간의 사유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운 사유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 안에 여러 개로 분열된 스스로를 똑바로 직면하게 된다. 진정한 자기 치유의 시작인 것이다. 

  좁고 오토바이가 휘몰아치듯 지나가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거의 온몸에 수분이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시장에서 망고 주스를 파는 사람들의 얼굴, 철물점에서 졸고 있는 남자, 카메라 렌즈의 진열장을 지나치면서 걷기는 내가 인지하지 못한 긴 시간 동안 자가 치유의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택시를 부르거나 툭툭이에 올라타지 못했던 머뭇거림은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던 무의식적인 나의 선택이었다.  

  “Anything else?”

  “That’s all.” 

  내가 주문 끝에 컵쿤카를 덧붙이자 캐셔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한국 사람이라고 답하자 캐셔는 BTS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최근에 들었던 태국 밴드의 노래를 이야기하다가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진다. 그렇게 짧게 그 장소와 시간 속에 머무르다가 주문한 음료를 받고 그 현장에서 이탈한다. 그 자리를 완전히 빠져나와 조금 전 그녀의 앳된 얼굴과 그녀가 사용한 단어들, 그리고 명찰이 떠오른다. 그러다 그녀의 나이대였던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과 섞여 타자 그 자체인 관광객이 된다. 그것은 모두 나의 걷기로부터 비롯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