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서평] 스토리셀링, 진짜로부터 달아나는 진실게임

― 윤고은, 『불타는 작품』, 은행나무, 2023.

2023-11-12     황유지 문학평론가

 

△ 사진= YES24

  서사가 넘쳐나는 시대,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고 전前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한다.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이 비켜난 자리는 세일즈가 차지한다. 스토리텔링 시대의 소비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약속받고 서사를 소비한다. 이른바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다. 서사의 위기란 우리 삶에 촘촘히 들어앉을 가능성으로써 저 멀리서 오는 지식으로의 서사 대신 우리 삶을 점령한 휘발성의 정보와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된 힘없는 서사들에 대한 일갈이다.* 이런 서사의 위기는 예술 전방위에 공유될 위협이기도 한바. 여기 커다란 스토리 세일즈의 판에 뛰어든 한 예술가가 있다.

  ‘로버트 재단’의 창작프로그램 지원 작가로 선정돼 입주 초대장을 받은 ‘안이지’는 ‘배달 라이더’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화가이다. 재단의 초대는 생계의 위협 앞에서도 그림에 대한 뚝심을 끝내 버리지 않은 그에게 ‘로또’처럼 찾아온 기회다. 프로그램의 특이점은 로버트가 ‘개’라는 사실과 피날레에 작품을 불에 태운다는 것. 소각 이벤트는 작품에 불멸의 가치를 싣는 유일하고 극단적인 형식을 제공하여 무명 작가에게 유명세를 안기기에 충분한 것이긴 하지만, 유일한 원본일 작품을 개의 선택에 맡겨 태워 없앤다는 것은 작가에게 께름칙함을 안긴다.

  소설은 안이지가 아틀리에에 입주하고 기묘한 일들을 겪는 과정과 작품 소각에 반발심을 갖고 소각 전 완벽한 모작을 그려 원본을 빼돌리고자 하는 일을 중심축으로 한다. 자본가의 퍼포먼스와 예술가의 진정성 사이의 줄다리기. 게다가 소설의 진실게임은 한 겹만이 아니라, 로버트를 작가로 이름나게 한 사진작가와의 저작권 분쟁부터, 사진의 피사체였던 남녀의 실종과 사망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해당 여성이 자신의 딸이라 주장했던 자산가 발트만 회장의 죽음 이후 재단과 로버트를 떠맡은 이들의 실체, 재단이 위치한 도시 Q의 모든 눈, 급기야 로버트의 고유성에 이르기까지 소설은 온통 의심스러운 것들로 둘러쳐져 있다.

  특히 한 예술가를 육박하는 것이 의심과 불안이라는 내부의 기제뿐만 아니라 외력과도 결부되어 있음을, 즉 코로나 팬데믹과 배달 노동, 연신 아틀리에 쪽으로 덮쳐오는 산불과 같은 재난의 육화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소설은 지속적인 긴장감을 획득한다. 발아래가 활활 타들어 가는 초조함 속에서 안이지는 여태 자신이 그토록 도려내고 싶었을 타자의 삶, 배달 노동에 자발적으로 접속하기도 한다. 배달앱을 켜 지도 위의 점으로 자신을 환원하는 행위는 예술의 숭고를 차치하고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해 더듬어 보게 한다. 개인의 존엄과 결부되는 것이 자기 확인이라고 할 때, 배달노동자의 삶과 화가의 삶 중 어느 것을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늘함은 안이지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순진성, ‘불타는 작품’은 불태워질 때 가치를 획득한다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서사가 안이지가 지키고자 했던 작품의 원본 여부를 압도한다는 데서 온다. ‘불멸’에의 유혹은 한 예술가를 유혹하는 선악과이지만 욕망은 채울 수 없음을 자양분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는 것을 그 본성으로 하기에 그대로 남을 뿐이고, 이 비밀을 알았던 한 자본가만이 자신의 서사를 스스로 절단하고 끼워서 파는 스토리셀링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 예술은 노동으로부터 파생되어 온 것이기에 노동의 속성을 공유하는바, 그중 가장 큰 공통분모는 소외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나에게 노크하고 나를 빠져나가며 나로부터 멀어지는 예술은 태어나자마자 나를 소외시킨다. 원본의 진위와 가치, 원본의 가능성이란 물음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것은 예술조차 ‘생산’하고 ‘소비’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생리와 더불어 끊임없이 ‘팔리길’ 원하는 예술과 예술을 ‘흉내’내는 온갖 서사의 얼굴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놓고 달아나는 저 현실들을 향해 소설은 묻는다. 진짜 우리의 서사는 어디에 있냐고.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3, pp. 133-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