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반공, 경제성장, 역사적 평가... 쿠데타는 혁명이 될 수 없다
△ 토론하고 있는 박상원씨(좌), 전다니엘 편집위원(중), 김동윤씨(우)
박상원(이하 박) :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박상원이다. 현재 현대정치철학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김동윤(이하 김) :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김동윤이다. 현재 개관 준비 중인 양재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대 : 전공자의 입장에서 5.16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 : 사전적으로 5.16은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으로 규정되어 있다. 즉 쿠데타이다. 이러한 개념적 정의와 더불어 당시의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60년대의 국제 정세를 보면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통치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정권 수립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냉전 분위기 자체는 조금 완화된 상황이었지만 이면에는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세력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국제 정세와는 다르게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서서히 민주화의 토양이 마련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나 장면 내각이 이러한 흐름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5.16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 결과 민주공화당 세력이 삼년 뒤에 선거에서 정치세력화되었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처음에 5.16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결국 용인한다. 미국이 쿠데타를 묵인한 이유는 냉전체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독재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내부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황 속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한국경제가 성장했고, 그 경제성장을 내세워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5.16은 원칙적으로 봤을 때 혁명이 아니다. 명백한 쿠데타다.
대 : 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는 5.16을 혁명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전혀 없나?
김 : 없다. 말이 필요 없다. 국민이 세운 정상적인 정부를 힘으로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 : 정치학 전공자의 입장은?
박 : 학술적으로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규정짓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것은 논문과 같은 학술 자료를 찾아본 결과이다. 한국정치사나 근현대사 관련 문헌들을 찾아봐도 정치학자들 대부분이 5.16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5.16개념규정보다 오히려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5.16이 어떤 정황 속에서 일어났는가, 이다.
대 : 원칙적으로는 쿠데타인데, 배경이나 상황을 고려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말인가? 시대 상황이라든지, 국제정세라든지 하는 정치학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가?
박 : 그렇다. 당시에 미국 정부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고 대응 시나리오를 여러 가지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결국엔 장면 내각의 실각을 용인했다. 이런 부분들은 당시 국제 정치의 이해관계와 밀접하다. 미국은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이 묵인을 결정하는 데에는 장면 내각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는 판단이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 : 한편에서는 장면내각이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서 5.16쿠데타가 명분 없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있다.
박 : 장면 내각은 4.19혁명을 계승한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적 절차를 밟아 국민이 직접 뽑은 정권이다. 정당한 절차를 밟아 국민의 동의를 얻은 뒤 수립된 정권을 무력으로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5.16은 명백한 쿠데타다. 그러나 장면내각이 무능했다는 점에도 이견은 별로 없는 편이다.
대 : 그 외에 다른 원인들은 또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박 : 사실 여러 원인들이 있었다. 먼저 군 조직구조에 대한 불만이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인사 상의 문제였다. 박정희와 육사 8기 동기생들은 계급 상승의 욕구가 있었지만 전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급할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군 내부의 불만을 증가시킨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승만 때부터 정치변화가 심했기 때문에 군은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육사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중 하나였고, 군은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런 점들도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김 : 역사적으로 볼 때 군인이 실적을 쌓을 기회는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이다. 박정희 윗세대들은 전쟁을 통해 그에 부합하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한국 전쟁 이후에는 군인들이 더 이상 공을 세울 무대 자체가 없었다. 역사적인 사례를 보았을 때 안정기에 무관들이 일으키는 내란은 대부분 5.16과 비슷한 형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5.16은 전형적인 경우이다. 단지 여러 조건들이 상황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사건 일어날 때, 딱 알맞은 조건이나 상황이 조성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그러한 조건들이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부합되면서 일의 성사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들을 고려했을 때 성공했다고 혁명이고 실패했다고 반란이 된다는 사고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5.16은 원칙상 쿠데타가 맞다.
박 : 역사학계의 보수 원로를 꼽자면 김일영을 말할 수 있다. 이 분의 저서를 살펴보면 박 정권의 공을 높이 사면서도 5.16은 명백한 쿠데타이며 훗날 혁명으로 둔갑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보수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의 저서에서조차도 5.16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쿠데타는 정상적인 국가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혁명, revolution은 해마다 별자리가 순환되어 변화하는 천체에서 가져온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체제를 군주정, 민주정, 군부정 세 가지로 나누고 이 정치체제는 별자리처럼 계속 순환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순환의 흐름 속에서 혁명이란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정치체제가 이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근대의 프랑스혁명 이후로는 민주정치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자유와 같은 가치를 내거는 헌법의 성립이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한마디로 다수 민중의 봉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찬성만이 혁명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 : 그런 관점에서 5.16을 본다면?
박 : 박정희 정권이 당시의 국제적인 냉전 상황과 국내적인 반공을 기치로 삼아 굉장히 위험했던 분위기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명분을 가졌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 공로 때문에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5.16사태는 헌정체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헌정체제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논의될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헌법 개정의 절차가 유효했는지, 국민투표가 공정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헌법이 바뀌었느냐, 즉 헌법개정 절차나 국민투표 과정과 같은 조건들을 잣대로 헌법이론이나 헌법변천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현실적 세계에서는 이런 판단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 방식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하는 판단은 그 정권이 지나간 이후에 결과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새로 집권한 정권에 대한 평가는 사후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판단할 때,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난 뒤 발생한 사건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과 같은 것으로 정당성을 만들어 옹호하려는 발상은 사후적인 해석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어떠한 결과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정당했다고 옹호하는 주장 자체가 굉장히 사후적인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판단에 맡긴다는 말은 애매한 표현이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한 일이 최선이었다, 라고 하다가 비판을 받으니까 각도를 바꿔서 후대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해도 박정희 정권에는 정당성이 없다.
대 : 정리를 하면, 토론 참여자는 물론이고 학계 역시 5.16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 : 사실 조선 시대까지는 국가체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물론 외부의 침입이나 내란, 봉기 등의 군사적인 시도들도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정리가 되면서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을 중심으로 사실상 군정체제가 이루어졌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체제로 이어지면서 군 세력이 최고 통수권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체제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4.19가 일어나기 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윗세대 사람들은 쿠데타를 바라볼 때 그것이 옳지는 않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 : 5.16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었다.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얼마 전 있었던 박근혜 대표의 발언에 대한 논의를 했으면 한다.
김 :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5.16 이후의 경제 선진화를 거론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과 그로인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업적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박 대표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쿠데타라고 말할 수는 없고,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대선 초기이다 보니까 행보가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에 얼버무리면서 나온 발언들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대선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인가 묻는다면 5.16 자체는 정책을 내세울 때 이제는 더 이상 큰 이슈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박정희 향수에 대한 재각인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서 5.16을 거론하는 것은 박정희 향수를 이용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 : 박근혜의 애매한 대답은 원래 가지고 있던 지지기반 층의 표와 더불어 반대의 표까지 같이 가지고 가겠다는 전략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김 : 박근혜의 뒤에는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이룬 경제성장에는 이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박근혜는 그 박정희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주입시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박 : 중요한 것은 5.16에 대한 질문을 박 대표에게 하는 것이 연좌제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연좌제적인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대통령 후보자의 역사인식에 대한 것이다. 대통령 후보라면 이에 대답을 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까 말했듯 박근혜는 5.16에 대해 말 바꾸기를 하고 있고, 유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유보하겠다고 발언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가 한 일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팩트가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체제 이후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에 이견이 없는 상황인데도 박근혜는 그 부분들과 확실하게 단절하지 못했다. 그런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면 실망스럽다. 대선에 임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맞는 역사인식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대 : 좋은 토론이 된 것 같다. 이번 토론은 5.16에 대한 학술적인 측면의 이해와 더불어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선에 5.16이 미치는 영향까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이번 토론에 참여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토론을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