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 큰별 지다

석재 조연현 교수 빈소에 다녀와서

2014-07-10     신상성

문학적 향기는 東岳(동악)의 전통으로
萬事(만사)를 인정과 애정으로 처리해

◇“앞으로 나에게 남아있는 세월이 얼마나 더 발휘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심히 회의적인 세월이 아닐 수 없다” 趙(조)교수의 마지막 저서가 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東京(동경)에서 날아든 한마디 悲報(비보)를 듣고 나는 선생님의 빈소로 달려갔다.

하나의 <죽음>은 우리들 앞에, 늘 그렇듯이 생소하게, 전혀 생경하게 부딪혀온다.

빈소에 걸린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하나의 바람, 한 줄기 빛줄기는 분명 거기 그렇게 냉엄하게 자리해 있었다.

선생님은 늘 별로 말이 없었다. 시끄럽게 떠들고, 주장하고, 핏대 세움도 없이, 모든 것은 늘 인정과 애정으로 처리하셨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論理(논리)는 <에세이>적 이면서 조금더 깊이 분석하면 단단한 철근빔을 만나듯이 용의주도하고 준엄한 데가 있었다. 公私(공사)가 분명하고, 여유낙낙했다.

1940년대부터 <한국문학>을 주도해 왔고, <현대문학>誌(지)를 26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그믐이면 우리의 책상위에 놓이게 했다.

광복 직후, 그 핏물 튀기는 이데올로기의 공포 속에서도 선생은 작은 몸을 맨 앞장 세워서 <순수문학>을 위한 투쟁에 헌신한 것이다. 그때의 徐廷柱(서정주)님과 金東里(김동리)님 등과의 손잡음은 이 땅의 문학정신과 문학발전을 위해 얼마나 다행했던 일일까?

모르긴 하지만 관세음보살의 미소보다도 못생긴 그미소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惠專(혜전)시절부터 東國文學(동국문학)의 중심인물이었고 <東大(동대)신문사> 주간을 역임하셨고, 母校(모교) 교수로 계속 재직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치셨고, 또한 <東國文學(동국문학)>의 산파역으로서 현재의 <東岳文人(동악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내셨다.

지금 선생님을 잃어버린 東岳(동악)의 문학도들과 한국문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남모르는 고통과 고뇌 속의 헌신이 없이 이 땅의 한국문학이 이만큼 고개를 들 수 있었을까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많은 얘길 해도 선생님의 이러한 애정과 피 말림은 아무리 자랑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石齋(석재)선생님이 동남아로 떠나기 바로 이틀 전날 막내 따님이랑 셋이서 저녁 식사를 했었다. 이번 <評論(평론)>주제에 대한 의논과 몇가지 덧친 일이 있어서 얘길 했었다.

저녁 식사 후 마루에 놓은 난로에 갈탄 덩어리를 하나씩 집어 넣으며 선생님은 다시금, 그 관세음보살보다 못한 미소를 하나씩 흘리며 담소하셨다.

아아, 그 웃음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서민의 웃음, 시골 할아버지 같은 웃음.

돌아 나오는 산비탈에 우뚝 서서, 나는 뒤쪽 북한산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또 세월은 가는 것. 바람은 불고, 그리하여 세상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눈발이 내리겠지.

한 분, 스승이자 선배이신 또, 정신의 어버이였던 石齋(석재) 선생님을 애도한다. 관세음보살 보다 못생긴 그 미소가 거룩한 씨앗으로 우리의 東岳人(동악인)들에게 오래오래 남을 것이며, 그 문학적 향기는 東岳(동악)의 전통과 함께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삼가 명복을 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