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사회문제 및 사회상
사람다운 생활보장 실현돼야
난무하는 폭력과 人命輕視(인명경시)풍토 근절되어야
人間精神(인간정신)의 포기, 파탄거듭… 現代人(현대인)의 비극
◇인간소외, 범죄 등 社會問題(사회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빈번, 잔혹해져간다. 우리 모두는 이들을 길러 낸 社會(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책임을 같이 느끼며 각자의 自省(자성)을 잊지 말아야겠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한 으레 크고 작은 마찰과 다툼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주변에서는 엄청난 아픔을 남기는 사건들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신문의 활자가 유난히 큰 날이나 TV아나운서의 억양이 떨리는 날이면 우린 내 아픔인 양 가슴이 메어짐을 느끼기도 하였고 참을 수 없는 울분에 피가 빨리 뜀을 느끼기도 하였다. 더욱이 요란한 화제의 주인공들 거의가 우리들 젊은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뼈저린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젊은 선생님은 놀음빚을 갚기 위하여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어린제자를 몰래 죽여 한강 기슭에 묻었다. 돈 많은 할머니의 죽음을 수사하던 경찰관이 예금통장을 챙겨 넣었다가 쇠고랑을 찼다. 어떤 대학생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의 수단으로 外國(외국) 사람들의 문화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경찰에 자살로 신고를 했다가 들통이 났다. 수업에 들어가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제자가 휘두르는 칼날에 팔뚝을 베이기도 했다. 공기단축이니 비용절감이니 하여 졸속한 공정으로 안전관리도 무시한 채 발파작업을 하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우리의 이웃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심지어는 내연의 처와 다투다 홧김에 술을 마신 젊은 경찰관이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을 난사 하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는 양민들이 무더기로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 외에도, 마치 공룡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피로 얼룩진 원색의 장면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의 망막에 새겨져 있다. 바야흐로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살벌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요즈음 세대에선 대화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형과 아우사이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연인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막혀 서로의 설득이란 것이 없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비극이며 불행이다.
사회심리학의 이론에 따르면 급진적으로 발전하는 산업사회나, 관료사회, 또는 도시생활에서 낙오된 자들의 갈등이 욕구불만으로 심화되면 그것이 광란으로 (소외되면 군중속의 고독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한다. 생각건대 현대자본주의의 결함으로 지적되고 있는 빈부의 차이의 극대화는 가진 자에 대한 못가진 자의 불만요인이 되기에 충분하며, 관료사회의 경직성에서 비롯되는 상하간의 불화가 욕구불만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도로 분업화된 일터의 단조로운 작업에서 오는 지루함이 현대인의 소외와 갈등으로 심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회문제는 이러한 난폭의 사회에서 적어도 그들만은 예외가 되어야 할, 더구나 순수무구 해야 할 대학생들까지 이성과 대화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오늘의 젊은이들은 異性(이성)과 대화를 잊고 폭력을 유일한 해결의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조국의 해방은 우리에게 일본인으로부터의 자유와 더불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다주었고, 6•25를 정점으로 하여 이 비극은 고조화 되었다. 전체 국민의 자유를 묶어 놓은 채 자유당의 장기집권만을 위하던 횡포가 종말을 고하던 1960년대에 들어서는 묶였던 자유가 풀어지자 2천5백만의 개인적인 자유가 상호 충돌하는 바람에 데모와 테러 등의 극한투쟁이 그칠 줄 몰랐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향락주의는 은둔주의와 표리의 관계로 대두하여 크게 판을 치게 되었고, 그런 틈을 타 물밀 듯이 들이닥친 서부영화는 총잡이의 행위를 영웅화 시켰으며, 이러한 경향은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부지불식간에 만연되고 만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고 하는 말은 인간사회가 폭력단체화 되어 인간이 원시동물로 전락하였다는 뜻을 내포한다. 짐승은 말 대신에 완력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언어가 있건만 이를 외면한 채 한사코 짐승의 수법만을 따르려 함으로써 말의 힘은 퇴화하고 주먹의 힘이 판을 치고 있음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 누구한테도 설득되지 않는 자, 나만이 유일한 자, 나없으면 안 되는 자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인간은 버림을 받는다. 버림받은 자에게는 오로지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절망이 바로 살인도 하게 되고 자살도 하게하는 것이다. 살인이나 자살은 다 같이 절망과 허무감의 소산이다. 즉 자신이 누구에게도 속하지 아니하며 누구도 자신에게 속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런데 절망했으며 혼자나 죽을 일이지 어째서 너 죽고 나죽자고 하는 것인지.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무한대의 자유와 더불어 우주적인 고독의 고배를 들이키고 있다고 한다. 이는 다시 바꾸어 말하면 가장 要愛性(요애성) (Liebesbedürftigkeit)이 풍부한 그들에게 사랑이 없으며 사랑의 구속, 곧 진정한 리더쉽에 목마른 그들에겐 방임만이 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제멋대로>뿐이다. 이러한 <제멋대로>는 방향타를 잃고 질주하는 쾌속정과 같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하게 마련이다. 고독과 자포자기와 불신과 버림받음에서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은 살인도 하고 자살도 하고 흡사 장난처럼 정사도 한다.
이 엄청난 살인주의와, 자살풍조와 정사유행은 흡사 그들의 욕구불만과 울분과 절망의 돌파구라도 되는 것처럼 별로 의미도 없이,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거침없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무의미한 살인, 별로 충분한 이유도 없는 자살과, 불가피한 조건도 아닌 정사의 횡행, 살육의 백병전보다 더 무서운 현대의 병균, 곧 정신의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각자가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힌 몸서리치는 고독감 절망감 좌절감 허무감과 불안감 속에서 정신의 혼미와 파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가 영위하는 일체의 일은 생명제일주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헌법이나 법률 속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보장되도록 되어 있다고 해서 생명이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존중은 또한 어떤 감시나 제재수단을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귀하게 다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한 양식에 따라 이웃을 가족처럼 아끼고, 어른을 부모처럼 공경하고 남의 집 어린애를 내 자식처럼 보살피는 정신이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할 때 비로소 인간의 생명은 존중될 수 있는 것이며,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5천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 차례도 침략을 모르는 백성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어쩌다 이웃 간에 불화라도 생기면 한잔 술로 기분을 달래고 떡 한쪽도 나누어 먹는 정이 있다. 우리의 혈관 속에는 분명 착한 피가 흐르고 있고 우리의 심장에는 틀림없이 대양 같은 아량과 포용력이 있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국민 전체에 대한 의식개혁운동을 상부의 지시가 아닌 국민 스스로 실천할 것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산품 애용이나 가정의례준칙을 열심히 지키는 일도 포함이 되겠지만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개혁은 이러한 범위보다 한차원은 높은 단계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곧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바르고 진지한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앞서 실현되어야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처에 난무하는 폭력과 인명경시의 풍토가 근절되어야함은 물론이려니와 그들을 길러낸 사회의 일원으로서 끊임없는 자성을 각자의 행동을 통하여 보여 주어야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젊은이들은 개척정신(frontier spirit)을 필히 길러 미래에의 꿈을 웅대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콜롬부스와 북미대륙, 카브랄(Cabral)과 남미대륙, 마젤란과 세계일주, 바스코다가마와 인도대륙, 마미야린소와 타타르해협, 아문젠과 북극, 버트와 남극을 생각해보면 자신과 그것과의 일체관계로서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자고로 고국을 떠나 타 대륙은 커녕 해양만을 무대로 활동한 사람도 장보고를 내놓고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것은 곧 모험정신이 박약하다는 증거다. 앵글로색슨 민족의 해적정신은 마침내 유니온 잭이 햇빛을 보지 않는 땅이 없도록 만들었으며, 이러한 정신이 오늘의 세계사를 막후에서 지배하고 조정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대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되기가 바쁘게 고향을 떠나 탐험길에 오르는 것이 풍습처럼 되어있다고 한다. 아홉 번째의 도전에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영국이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발자취를 남긴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 다윈이 20여세 때 비글호를 타고 남미대륙과 남태평양의 섬들을 편력하므로써 후일 다위니즘의 완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근거가 되었다.
오랜 역사의 나라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젊은이 들이 외국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Frontier spirit뿐이다. 고도로 지능화, 잔인화 되어가는 범죄문화(Crime Culture)는 그토록 쉽게 빨리 잘 배우면서 그들의 활기차고 건전한 정신문화는 왜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친구들도 높은 산을 정복하고 망망한 바다를 조그만 배를 타고 건너갔다. 우리 스스로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고향이나 고국만이 우리의 무대가 아니다. 人間到處有靑山(인간도처유청산)이라고 했다.
미지의 세계 어디라도 머물러 살면 고향이 된다. 늘 고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조국을 심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물의 벽을 과감히 뛰어넘어 내일을 향한 황무지이다. 우렁차게 새 말뚝을 박을 때에 비로소 선진대열에 이르는 광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나’만을 위하여가 아닌 ‘우리’들을 위하여 ‘안’에서가 아닌 ‘밖’으로의 ‘큰 숨’을 쉴 때가 된 것 같다.